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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Oct 31. 2020

그림 속 그녀, 책 속으로 들어가다

진주 귀고리 소녀 by 트레이시 슈발리에

그림 속 그녀



출처: 교보문고

개인적으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번역 소설의 제목은 <진주 귀고리 소녀>이다. (참고로 '귀걸이', '귀고리' 모두 표준어다.) 영어 제목은 Girl with a Pearl Earring.




아마 모두들 한번쯤은 봤을 법한 그림. 머리에 파란 두건을 두른 한 소녀가 커다란 진주 귀걸이를 한 채 살며시 돌아보는 그림. 흔히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다.


옷이나 머리의 두건으로 보아 높은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소녀가 어이해서 귀한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는 걸까. 두려움도, 피곤함도, 부끄러움도 없는 담담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당신을 보고 있는 그녀. 그녀는 어떤 사연으로 그림 속에 들어가 있게 된 걸까. 아마도 이런 궁금증 때문에 이 그림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생겨났으리라. 그 이야기를 가장 먼저 접한 건 영화였다.



스칼렛 요한슨과 콜린 퍼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 영화에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찾아읽은 원작은 영화보다 훨씬 더 감명 깊었고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영화보다는 책이 더 잘 맞는듯 하다.



넘을 수 없는 선. 그림에 매혹되어 버린 소녀


한 뛰어난 화가의 집에서 잡일을 돕는 거주 가정부로 일하게 된 소녀 그리엣. 얼음장 같은 마나님, 말 안듣고 말썽부리는 아이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선배 가정부 타네케, 힘들기만 한 남의 집살이. 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녀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색깔의 조화, 그림이었다.


빨래, 청소, 다리미질, 물긷기, 바느질 등등 하루종일 허리 펼 새 없이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도 그녀가 가장 기다리는 일은 바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화실을 청소하는 거였다. 그림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끝나는 게 아닌지라, 그림이 끝나는 몇 달동안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배경이라던가, 테이블 위의 사소한 물건 하나도 모두 있었던 그자리에 고스란히 놓여 있어야 했다. 안 그러면 기껏 그리던 그림이 달라지니까.


처음에는 그저 아무런 사물도 건드리지 않고 청소만 하던 그녀는 점점 빛의 조화와 색깔에 눈을 뜨게 된다. 선배 가정부와 마나님 몰래 화가의 잔업무를 도와주게 된 그리엣. 물감을 사오고, 물감을 개고, 그림의 구도에 대한 조언까지 건네고. 만일 남자였다면 어쩌면 화가의 제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그녀는 한낱 가정부일 뿐. 그녀가 그림을 좋아한들, 화가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챈들,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줄


1.

“I see you have separated the whites,” he said, indicating the turnips and onions. “And then the orange and the purple, they do not sit together. Why is that?” He picked up a shred of cabbage and a piece of carrot and shook them like dice in his hand.
I looked at my mother, who nodded slightly.
“The colors fight when they are side by side, sir.”
He arched his eyebrows, as if he had not expected such a response. (p. 5)

"하얀 것들을 따로 구별해놨네." 그가 무와 양파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리고 주황색이랑 보라색도 함께 놓지 않았고. 왜 그런 거지?"
그는 양배추 조각과 당근 조각을 집어들고는 주사위처럼 손 안에서 흔들었다.
내가 엄마를 바라보자 엄마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란히 있으면 그 색깔들이 서로 싸우거든요."
그는 마치 이런 대답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리엣은 그저 부엌일을 하는 가정부에 불과하지만, 색에 대한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당근, 양배추, 양파들을 썰어놓을 때에도 색깔의 조화를 고려해서 구분해 놓았던 것.


2.

While Catharina was unlocking the studio door on the second morning I asked her if I should clean the windows.
“Why not?” she answered sharply. “You do not need to ask me such petty things.”
“Because of the light, madam,” I explained. “It might change the painting if I clean them. You see?”
She did not see. She would not or could not come into the room to look at the painting. It seemed she never entered the studio. When Tanneke was in the right mood I would have to ask her why. Catharina went downstairs to ask him and called up to me to leave the windows. (p. 41)

둘째 날 아침, 카타리나가 화실 문을 열 때 나는 창문을 청소해도 되는지 물었다.
"안될 게 뭐 있어?" 그녀가 뾰족하게 대꾸했다. "그런 하찮은 일은 물어볼 필요 없어."
"빛 때문입니다, 마님." 내가 설명했다. "제가 창문을 닦으면 그림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녀는 몰랐다. 그녀는 그림을 확인하러 방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고,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녀는 절대로 화실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타네케 기분이 좋을 때 그녀에게 왜 그런지 한번 물어봐야겠다. 카타리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주인님께 물어보더니 창문은 청소하지 말고 놔두라고 소리쳤다.


먼지로 더러워진 창문을 닦아서 깨끗해지면 방 안에 들어오는 빛이 바뀐다. 빛이 바뀌면 그림도 바뀐다. 그걸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가정부 그리엣.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카타리나. 어쩌면 카타리나의 불안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다른 여인이 자신보다 더 남편의 그림을 이해하고 있다는 데에서.


3.

“What color are those clouds?”
“Why, white, sir.”
He raised his eyebrows slightly. “Are they?”
I glanced at them. “And grey. Perhaps it will snow.”
“Come, Griet, you can do better than that. Think of your vegetables.”
“My vegetables, sir?”

“Think of how you separated the whites. Your turnips and your onions – are they the same whites?”
Suddenly I understood. “No. The turnip has green in it, the onion yellow.”
“Exactly. Now, what colors do you see in the clouds?”
“There is some blue in them,” I said after studying them for a few minutes. “And – yellow as well. And there is some green!” I became so excited I actually pointed. I had been looking at clouds all my life, but I felt as if I saw them for the first time at that moment.
He smiled. “You will find there is little pure white in clouds, yet people say they are white.”

It became a bright but not a white wall. When the light shone on the wall, I discovered, it was not white, but many colors.
The pitcher and basin were the most complicated – they became yellow, and brown, and green, and blue. They reflected the pattern of the rug, the girl’s bodice, the blue cloth draped over the chair – everything but their true silver color. And yet they looked as they should, like a pitcher and a basin.
After that I could not stop looking at things. (p. 101)

"저 구름들이 무슨 색이지?"
"흰 색입니다, 주인님."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진짜?"
나는 구름을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 회색이요. 어쩌면 눈이 오려나 봅니다."
"그리엣, 그거 보다는 더 잘 알 텐데. 네 야채들을 떠올려봐."
"제 야채들이요?"
...
"네가 흰색 야채들을 따로 놓았던 걸 생각해보라고. 순무랑 양파. 그게 같은 흰색이었나?"
갑자기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아니요. 순무는 그 안에 초록이 있었고, 양파는 노랬어요."
"바로 그거야. 자, 구름에서 어떤 색이 보이지?"
"파란색이 조금 보여요." 나는 구름을 몇분동안 관찰한 다음 말했다. "그리고, 노란색도요. 그리고 초록색도 조금 있어요!"
나는 너무 흥분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내 평생 구름을 봐왔지만 마치 그 순간 구름을 처음 본 사람 같았다. 그가 미소지었다.
"구름 속에 진짜로 순전히 하얀색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구름이 하얗다고 말을 하지."
...
벽은 밝았지만 흰색이 아니었다. 빛이 비치면 흰색이 아니라 많은 색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주전자와 대야는 가장 복잡했다. 노란색이 됐다가, 갈색, 초록, 그리고 파란색이 됐다. 양탄자의 무늬, 소녀의 옷, 의자에 걸쳐진 파란 천 등 그 본연의 색인 은색 빼고 모든 색이 다 반사되어 보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주전자와 대야로 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사물을 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타고난 감각에 더해서 화가의 도움으로 색의 조화에 한층 더 눈을 뜬 그리엣. 그녀가 느꼈을 감동이 종이를 뚫고 내게도 전해져 뭉클했다.


4.

“Tell me, Griet, why did you change the tablecloth?” His tone was the same as when he had asked me about the vegetables at my parents’ house.
I thought for a moment. “There needs to be some disorder in the scene, to contrast with her tranquility,” I explained. “Something to tease the eye. And yet it must be something pleasing to the eye as well, and it is, because the cloth and her arm are in a similar position.”
There was a long pause. He was gazing at the table. I waited, wiping my hands against my apron.
“I had not thought I would learn something from a maid,” he said at last. (p. 135)

"그리엣, 왜 테이블보를 바꾼거지?" 그는 우리 부모님 집에서 내게 야채에 대해 물었을 때와 같은 어조로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 화면에서 그녀의 고요함과 대비되는, 뭔가 무질서함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내가 설명했다. "뭔가 시선을 놀리는 것, 하지만 또한 보기에 거슬리지 않아야 해요. 왜냐하면 천과 그녀의 팔이 비슷한 위치에 있으니까요."
오래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나는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기다렸다.
"가정부에게서 뭔가 배울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가 마침내 말했다.


화가가 그림 그리는 배경은 오직 청소만 할 뿐,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림과 배경의 테이블을 보던 그리엣은 테이블보의 위치를 바꾸는 게 그림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해서 위치를 바꾼다. 화가에게 혼날 것을 감수하고. 그런데 그것을 보고 그리엣의 통찰력과 재능에 더 놀란 화가 요하네스.


5.

“I do not want you to paint me with my mop.” I said it without knowing that I would.
“No. No, you’re right, Griet. I would not paint you with a mop in your hand.”
“But I cannot wear your wife’s clothes.”
There was a long silence. “No, I expect not,” he said. “But I will not paint you as a maid.”
“What, then, sir?”
“I will paint you as I first saw you, Griet. Just you.” (p. 179)

"제가 대걸레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리시는 건 싫어요." 나도 모르게 그 말이 입에서 나와버렸다.
"아니야. 네 말이 맞아, 그리엣. 네가 대걸레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리진 않을 거야."
"하지만 전 마나님의 옷은 입을 수 없어요."
오래 침묵이 흘렀다. "그래, 안 되겠지." 그가 말했다. "하지만 너를 가정부의 모습으로 그리진 않을 거야."
"그럼, 어떤 모습으로 그리시게요, 주인님?"
"내가 너를 처음 본 모습대로 그릴 거야, 그리엣. 그냥 너로."


이렇게 해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이 탄생하게 된다.


* 이 책에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들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다음 주 글에서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들과 책 속에 나온 묘사를 직접 비교해볼까 한다.




제목: 진주 귀고리 소녀

원서 제목: Girl with a Pearl Earring
저자: 트레이시 슈발리에 (Tracy Chevalier)

옮긴이: 양선아

출판사: 강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강 출판사 것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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