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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Nov 15. 2020

무심한 척 건네는 위로. 그래,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되겠지 by 김중혁

킥킥거리며 웃다 보면 가슴에 남는 게 있다.



김중혁 작가를 좋아하지만, 사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아이유를 좋아하면서도 노래 "좋은 날"을 들어보지 못했고, 유재석을 좋아하면서도 "무한도전"을 한번도 안 봤다는 말과 같으니까.


미국에 살고 있는지라 한국 책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핑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이 좀 어두운 분위기일까봐 읽지 않은 것도 있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데, 그런 책까지 읽으면 헤어나오지 못할 거 같아서. 그래서 산문집을 선택했다.


제목부터가 너무나 마음에 드는 <뭐라도 되겠지>. 생각보다 두꺼운 책이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킬킬거리며 읽었다. 읽으면서 웃고, 웃다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책을 덮은 후에는 묘한 희망이 생기는 책.



재주꾼 김중혁 작가는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이 책 표지도 그가 그렸다.

출처: 교보문고


사실 내가 원래 알고 있던 "뭐라도 되겠지"는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 했던 말이었다. 정준하가 정형돈에게 "날 세워놓고 네가 그렇게 재미있으면 내가 뭐가 되냐?"라고 투정부리듯 말하자 정형돈이 쉬크하게 "뭐라도 되겠죠, 형님."하고 말했던 장면. 보면서 무척이나 킥킥거렸었는데.
 

출처: 인터넷


그런데 그 쉬크한 말이, 선심 쓰듯 "옛다, 여기. 뭐라도 되겠지." 하고 던지는 그 말이, 김중혁 작가의 손을 거치니 이렇게나 위로가 되는 말인 줄 몰랐다. 나이가 많지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특출나게 빼어난 재능은 없지만, 이제라도 열심히, 즐겁게 부딪혀 보면 그래, 뭐라도 되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든 생각.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글이다! 위트가 넘치고, 재미있고, 술술 읽히지만 읽고 나면 남는 게 있는 것!

역시 이런 글을 읽으면 나도 쓰고 싶어진다. 좋은 글의 특징이라고나 할까.

그러고보니 위트가 넘치는 재기발랄한 글이라는 점에서 박민규 작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떠오른다. 다만 그건 소설이고 (게다가 표절 논란에 휘말렸고), 이건 산문이라는 게 다르지만. 

그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 겠다. 해외 배송을 해서라도.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시다면, 책을 읽어보시라.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줄


1.

시간은 늘 우리를 쪽팔리게 한다. 우리는 자라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록은 정지하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쪽팔림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쪽팔림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p. 17)


예전에 쓴 글을 읽으면 쪽팔렸는데. 그래서 아예 흔적을 안 남기거나, 지우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쪽팔리다는 건 내가 그만큼 진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군.


2.

인생이 예순부터라면, 청춘은 마흔부터다. 마흔 살까지는 인생 간 좀 보는 거고, 좀 놀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지 오리엔테이션에나 참가하는 거다. 그러니까 마흔 이전에는 절대 절망하면 안 되고,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체념해서도 안 되는 거다. 마흔이 되어보니 이제 뭘 좀 알겠고(알긴 뭘 알아, 라고 호통치실 어른들 많겠지만) 이제 뭘 좀 해볼 만하다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이제부터는 계급장 떼고, 스펙 떼고, 출신 학교 떼고, 제대로 한번 붙어볼 생각이다. (p. 23)


그래, 이제 뭘 좀 해볼만 한 것 같다. 제대로 붙어보자!!


3.

내가 생각하기에 ‘재능’이란, (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p. 73)


이 말이 이렇게 위로가 될지 미처 몰랐다. 뭐라도 되겠지.


4.

쉬는 시간이 되면 나와 친구들은 1분이라도 더 놀기 위해서 탁구공과 자를 들고 교실 뒤편 공터로 뛰어갔다. 40분 수업에 10분 휴식이 아니고, 10분 경기에 40분 휴식이었다. 1교시 쉬는 시간에 펼쳐진 경기는 2교시 쉬는 시간으로 이어졌고, 점심시간이 되면 계속 탁구공 야구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잘 놀고 이렇게 건강한 어른이 되었다. (p. 122)


그래. 요즘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잘 놀고, 이렇게 건강한 어른이 될 기회를 줘야겠지. 

너무 닦달하지 말고.


5.

그의 밴드가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에 출연하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내가 물었다. 밴드의 목표가 뭐예요?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목표가 없다고 했다. 그냥 음악을 할 뿐이라고 했다. 대답을 듣고 내 질문을 후회했다. 어째서 목표 따위를 물었을까. 예술에 목표 같은 건 없다. 집중을 요구하는 권이나 군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겠지만, 마음이나 예술에는 목표가 없다. 마음을 기록하는 예술은, 그러므로 산만한 자들의 몫이다. (p. 157)


6.

어쩌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데, 누군가로부터 잘못 살고 있다고 계속 비난받고 있어서 자꾸만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아닐까. (p. 172)


누구야? 누가 자꾸 날 비난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거야?




제목: 뭐라도 되겠지

저자: 김중혁

출판사: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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