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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Dec 26. 2020

신념을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장미의 이름 by 움베르토 에코

두꺼운 책, 어려운 책, 끝내지 못한 책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독서 편식이 심하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쉬운 책만 읽곤한다. 가장 만만한 것은 청소년 소설. 어휘도 쉽고, 재미도 있는데다가 300 페이지 내외라 별로 길지도 않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편협한 독서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가끔은 더 길거나 어려운 책, 비소설 등에 도전을 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두껍고 어려운 소설'에 도전을 하게 됐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이 책은 무려 대학생일 때 (아, 도대체 언젯적인가..) 한글로 읽었었는데, 분명 우리말로 읽는 데도 무척이나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어찌어찌 따라가며 책을 끝내긴 했지만, 결단코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언제고 시간이 되면 다시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던 이 책을 드디어 읽게 됐다.



도전에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법



아주 오랜만에, 그것도 영어로 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저 우연이었다. 작년, 동네 중고책 장터에 <장미의 이름>이 나와 있기에 덥썩 사버린 것이다. 물론 그때 사놓고도 읽지는 않고 그냥 책꽂이에 꽂아만 뒀었다. 그런데 두툼한 책이 책꽂이에 꽂힌 채 계속 날 바라보고 있으니 안 읽을 도리가 없었다. 얇은 책이라면 눈에 띄지도 않을 텐데, 두꺼우니 그 옆을 지나칠 때마다 눈에 확 띄곤 했다. 하지만 무작정 읽겠다고 덤볐다가는 중간에 덮어버릴 확률이 컸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인터넷을 뒤져서 <장미의 이름>을 읽기 전에 필요한 사전 지식들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튜브를 통해 유창선 평론가가 설명한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읽기"를 본 것이 도움이 많이 됐다. 기본적인 시대 배경, 황제와 교황의 대립관계, 각 종파의 주장 등을 알고 나니 책을 읽는 게 더 수월해졌다. 책에 수록된 수도원의 지도도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펼쳐봤다. 책의 묘사를 읽으면서 지금 어디쯤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사람들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는지 파악하면 책의 내용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두꺼운 책, 어려운 책, 그러나 재미있는 책


나름 준비운동을 하고 뛰어들어서인지 이번에는 영어로 읽는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중세시대의 수도원이 배경이고, 각 종파와 황제의 알력다툼이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은 추리물이다. 살인 예고와 살인사건이 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명석한 두뇌의 탐정 역할을 하는 사람(윌리엄 수도사)이 있다.


계속해서 반 발자국 차이로 뒤늦게 쫒아가는 게 아쉽지만, 그게 너무나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건이 흘러가는 맛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는 범인이 누굴까,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지만, 다 읽고나면 다른 철학적 질문들도 떠올리게 된다. 과연 진리란 무엇일까.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을까? 만에 하나 나의 믿음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내가 옳다고 믿더라도 그 믿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나와 세상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그 믿음은 누가 확인시켜줄 수 있는 것일까?



간략한 줄거리


1327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일련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교황과 수도회의 청빈 논쟁 때문에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오게된 윌리엄 수도사는 얼결에 이 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수도회들의 토론을 앞두고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살인 사건은 묵시록의 예언 대로 하나씩 벌어지고, 그 사건을 조사하면서 윌리엄 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비밀을 조금씩 파헤치게 되는데...


재미는 있지만 분명 준비운동이 필요한 책이다. 미리 배경 지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읽는다면 훨씬 더 잘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 번역판 표지. 내용과 아주 잘 어울리는 표지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표지.

출처: 교보문고


 

영어판 표지.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그림이 더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데, 영어판에서는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훨씬 더 크다. 아무래도 유명한 작가라서 그런 것 같다.

출처: Goodreads


 

출처: 다음 영화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영화 배경 자체가 중세 시대라 오래된 영화라는 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숀 코너리가 굉장히 똑똑하고 현명한 수도사 윌리엄 역할을 맡아서,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들을 추리하게 된다.



그래서, 장미는 무슨 뜻일까?

이 책은 극 중 윌리엄 수도사의 수련제자였던 아드소가, 자신이 젊었을 적 겪었던 일을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노년이 되어 기억을 되살려 적어나가는 수기 형식이다. 기이했던 수도원의 살인 사건들. 무엇을 위해 살인을 했을까? 어떤 고귀한 목적을 위해 이런 끔찎한 짓을 저질렀던 것일까?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The rose of old remains only in its name; we possess naked names.


과거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와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름뿐인 것이다. 그 장미라는 허울뿐인 이름을 위해 누군가는 살인을 저지르고, 누군가는 자신의 몸을 내던진다. 그런데, 정말 그 이름은 허울뿐인가? 그 이름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것인가?


저자 움베르토 에코는 이 제목을 우연히 떠올렸다고 한다. 장미는 오래전부터 매우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은 어떤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려워진 면도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어느 하나로 특정지을 수 없다는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고.


책을 읽고 각자가 '장미의 이름'이 무슨 뜻일까를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줄


(시대 배경이 예전이라 그런지, 문체 때문에 번역이 좀 어렵네요. 여러번 고쳤지만 너무 문어체가 돼버렸어요. 기회가 되신다면 전문가가 번역한 한글 번역본을 읽으시길 권합니다.)


1.

"Then why do you want to know?
"Because learning does not consist only of knowing what we must or we can do, but also of knowing what we could do and perhaps should not do."

"그럼 왜 알고 싶으신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뭘 해야만 하는지 혹은 뭘 할 수 있는지 아는 것만이 배움은 아니기 때문이야. 배움이란 때로는 우리가 못했던 것, 그리고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아는 것도 포함되니까."


2.

자신의 수련 제자인 아드소에게 충고해주는 말.


Fear prophets, Adso, and those prepared to die for the truth, for as a rule they make many others die with them, often before them, at times instead of them.  

아드소, 예언자들, 그리고 진실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 이들을 두려워하거라. 왜냐하면 그들은 대개 수많은 다른 이들을 자신들과 함께 죽게 만들거든. 종종 남들을 자신들보다 더 먼저 죽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들이 자신들 대신 죽게 만들기도 하지.




제목: 장미의 이름

원서 제목: The Name of the Rose

저자: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옮긴이: 이윤기

출판사: 열린책들
특이사항: 1986년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숀 코너리가 주인공인 윌리엄 수사 역할을,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그의 수련제자 아드소 역할을 맡았다.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열린책들 출판사 것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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