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by 더글러스 애덤스
처음 제목을 들었던 건 15년 전이었다. 뭔가 길게 설명하는 듯한 제목이 기분 좋게 낯설었고(적어도 그 제목을 처음 들었던 15년 전에는), '히치하이커'와 '은하수'와 '여행'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매우 신선했다. 하지만 기대를 품고 봤던 영화는 보는 내내 "이게 뭐야!"와 "뭥미?" 사이를 오가게 만들었다. 책을 읽지도 않았고, 내용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봤던지라, 그 영화가 내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B급 SF 코미디처럼 보였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찬사를 보내는지, 왜 이 책이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으며, 왜 책의 시리즈가 계속 만들어졌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한 거니까. 이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겠지. 요새 말로 '취존'을 해주며 그 제목과 내용은 서서히 머릿속에서 잊혀 갔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처음엔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내가 읽고 싶은 책이 대출 중이라 그 책이 반납되길 기다리며 비는 시간에 읽기 위해) 빌렸는데, 읽다 보니 영어도 쉽고, 내용도 재미있어서 푹 빠지게 됐다. 그 15년 사이에 내 취향이 무르익은 탓일까?
출처: 교보문고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주인공 아써 덴트는 인생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모닝커피도 마시기 전에 창밖에는 포클레인들과 인부들이 그의 집을 철거하기 위해 와 있었다. 우회로를 만들기 위해 그의 집을 철거를 해야 한단다. 그 사실을 이미 몇 개월 동안이나 공지해왔단다. 이의를 제기하려면 진작 했어야 했다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어느 구석진 사무실의 문이 잠긴 지하실에 그 공지가 게재됐다는 건 안 비밀.)
인부들과 포클레인을 허망하게 보고 있던 그의 앞에 마침 오랜 친구 포드가 나타난다. 친구야, 마침 잘 왔어! 나 좀 도와 줘! 지금 내 집이 철거될 거 같아! 그런데 포드가 하는 말이 좀 이상하다. 집이 문제가 아니라고. 이 '지구'가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고. 아, 그리고 자기는 사실 외계인이라고. 읭?
그의 말인즉 이랬다. 자기는 외계인이고, 15년 전에 지구에 왔다가 돌아가는 우주선을 놓쳐서 표류하게 됐다고. 우주선을 히치하이킹해가며 은하수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은하수 곳곳을 설명해주는 여행안내 책자가 있는데, 자신은 그걸 새로 업데이트하기 위해 이 지역을 맡아 오게 됐던 거라고. 지금 은하계에서 우회로를 내기 위해 그 길을 막고 있는 지구를 철거하려고 우주선 포클레인이 지구 상공에 와 있고, 이제 한 시간 후면 지구는 곧 철거될 거라고.(!) 그 사실을 이미 50년 넘게 공지해왔단다. 이의를 제기하려면 진작 했어야 했다고. (지구인의 기술로는 아무도 그 공지를 듣거나 볼 수 없는, 지구에서 4광년 떨어진 행성에 그 공지가 게재됐었다는 건 안 비밀.)
지구가 곧 멸망한다니!!!!!!
걱정 말게, 친구. 내게는 타월이 있거든.
지구가 철거되기 전에 히치하이킹을 해서 이 지구를 벗어나면 되지.
그렇게 해서 아써와 포드는 히치하이킹을 해서 우주선을 타게 되고, 곧 또 다른 외계인들과 만나며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일단 내용이 재미있다. 온갖 말장난과 풍자와 유머가 페이지마다 섞여 있어서 웃으면서, 무릎을 치면서 볼 수밖에 없는 책이다. 작가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이렇게 웃기고, 재미있고, 허황된 책은 쓰면서도 얼마나 신났을까 싶다. 번역서로 읽은 게 아니라서 우리말로 옮겼을 때 이 재미가 얼마만큼 제대로 전달될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래도 책 본연의 재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다 읽은 뒤 오디오북으로도 또 들었다. 오래됐지만 영화도 다시 찾아보고 싶다. 책의 내용을 알고 나니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출처: Goodreads
처음엔 B급 SF책 표지처럼 보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이해가 가는 그림.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생쥐까지 다 의미가 있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된다.
출처: 다음 영화
영화로도 만들어졌음.
1.
He felt that his whole life was some kind of dream and he sometimes wondered whose it was and whether they were enjoying it. (p. 12).
자신의 삶 전체가 일종의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가끔은 이게 도대체 누구의 꿈인지, 그들은 이 꿈을 즐기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2.
“You know,” said Arthur, “it’s at times like this, when I’m trapped in a Vogon airlock with a man from Betelgeuse, and about to die of asphyxiation in deep space, that I really wish I’d listened to what my mother told me when I was young.”
“Why, what did she tell you?”
“I don’t know, I didn’t listen.” (pp. 45-46).
"있지." 아써가 말했다. "내가 이렇게 베텔루스에서 온 외계인이랑 같이 보곤의 우주선에 갇혀있고, 우주 한복판에서 질식해 죽을 때가 되니까, 이제야 어렸을 때 엄마 말씀 좀 잘 들을 걸 하고 후회가 돼."
"왜, 엄마가 뭐라셨는데?"
"모르지. 안 들었으니까."
나를 웃게 만들었던 수많은 말장난들 중 하나.
3.
He reached out and pressed an invitingly large red button on a nearby panel. The panel lit up with the words Please do not press this button again. (p. 56).
그는 근처 패널에 있는 눈에 띄게 커다랗고 빨간 버튼을 손을 내밀어 눌렀다. 그러자 패널에 불이 들어오며 '다시는 이 버튼을 누르지 마세요.'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이것도 역시 웃겼던 거. 누르지 못하게 할 거면 도대체 왜 커다랗고 빨간 버튼을 만든 것인가.
4.
“Can you fly her?” asked Ford pleasantly.
“No, can you?”
“No.”
“Trillian, can you?”
“No.”
“Fine,” said Zaphod, relaxing. “We’ll do it together.” (p. 76)
"저 우주선 비행 운전할 줄 알아?" 포드가 기쁘게 물었다.
"아니, 너는?"
"못 해."
"트릴리안, 넌 할 줄 알아?"
"아니."
"좋았어." 자포드가 안심하며 말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는 거야."
아니, 결국 아무도 우주선을 몰 줄 모른다는 거잖아! 전혀 안심할 상황이 아닌데? 모두 함께 한다 해도?
이런 병맛(?)이 바로 웃기는 묘미.
5.
For a moment, nothing happened.
Then, after a second or so, nothing continued to happen. (p. 127).
잠깐 동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약 1, 2초 후에도 계속해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것도 나를 웃게 만든 수많은 문장들 중 하나. 쓰나 마나 한 얘기, 하지만 그래서 더 어이없고 웃기는 표현들.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게는 완벽한 취향저격이었다.
이 외에도 말장난이나 유머가 굉장히 많은데, 너무 길게 설명해야 해서 뺀 것들이 많다. 이런 쪽 유머를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제목: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원서 제목: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 (Douglas Adams)
옮긴이: 김선형, 권진아 옮김
출판사: 책세상
특징: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음.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김선형/권진아 님의 번역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