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즈 러너 by 제임스 대시너
기억 상실. 청소년들. 미로.
전에 이 책을 읽으려다가 '십 대 청소년들이 외진 곳에 갇혀있는' 설정이 나와서 바로 고전인 <파리대왕>을 읽었었다. 이왕 같은 설정이라면 고전을 먼저 읽고, 최신작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고전에 대한 오마주나 암시가 있을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 둘은 '십 대 청소년들이 외진 곳에 갇혔다'는 초반 설정만 같을 뿐 아주 다른 소설이었고, 소설의 완성도나 깊이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주인공 토마스는 사방이 막힌 캄캄한 방에서 정신을 차린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 자신의 이름만 빼고. 알고 보니 그가 깨어난 곳은 커다란 땅 속 구덩이 안에 설치된 철제 엘리베이터(?) 같은 곳이었다. 그때 마치 상자처럼 천장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게 된 토마스. 그가 도착한 이곳에는 십 대 청소년들(정확히는 남자아이들)만 있었다. 토마스처럼 자신의 이름 빼고는 모든 기억을 잃은 남자아이들.
이곳에 한 달에 한번 자신이 타고 왔던 엘리베이터(토마스는 캄캄한 방이라고 생각했던)를 통해 새로운 소년이 도착하고, 그 외에 이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옷이나 운동화, 시계 등의 물품도 배달된다.
이들이 거주하는 곳은 넓었지만 사방은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 절벽 사이를 빠져나가면 밖은 거대한, 정말로 거대한 벽들이 미로(maze 메이즈)를 그리며 서 있었다. 그 미로는 워낙 커서 하루 종일 달리며 관찰해도 다 보지 못할 정도의 크기였다. (책 속 세상에서는 각 청소년들이 요리, 건축 등 각자 역할을 분담해서 생활해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커다란 미로를 하루 종일 달리며 지도를 그려서 빠져나갈 길을 찾아내는 멤버들을 '메이즈 러너 maze runner'라고 불렀다.) 더군다나 그 미로는 주기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미로를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건 요원했다. 밤이 되면 이곳을 둘러싼 절벽이 마치 기계장치처럼 움직여서(!) 거대한 미로로 통하는 입구를 완전히 닫아 버린다. 이건 좋은 일이었다. 밤이 되면 저 밖에 있는 미로에는 괴물들이 돌아다녔으니까.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누가 이들을 모아놓은 것인가? 이들의 기억은 왜 삭제됐는가? 필요한 물품까지 보내주면서 이들을 이곳에 가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거대한 장치와 커다란 미로를 만들 수 있는 집단은 누구인가? 괴물들은 왜 나타나는 것인가?
모든 것은 베일에 싸여 있었고, 이들은 외로움과 공포로 미칠 것 같았지만 (그리고 탈출하려고 시도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잘 적응해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 처음으로 여자 청소년이 도착하고,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날 거라는 말만 남긴 채 기절해버린다. 이제는 더 이상 엘리베이터를 통해 다른 청소년이 오지 않는다. 보내주던 보급품도 끊겼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없이 이곳을 탈출해야만 한다. 괴물이 들끓는 미로를 통과해서.
출처: 교보문고
언제나 그렇듯 영화화됐다는 걸 엄청나게 강조하는 표지. 독자의 눈을 사로잡고,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참 마음에 안 드는 표지다. 제목도 영어 제목을 그대로 옮겨와서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는 것도 감점 요인. (뭐, 내가 점수를 매기는 입장은 아니지만..)
책의 첫 부분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설정도 신선했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좋았다. 특히 주인공 토마스가 밤에 미로에 갇혀 괴물들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장면은 심장이 쫄깃할 정도로 묘사가 탁월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점점 진행되면서 "아, 이건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초반에 던진 떡밥들과 후속작을 위한 연계성 때문이겠지만, 이야기가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너무 산으로 가는 것 같았다. 결국 후속작을 읽어야 이 거대한 음모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얘긴데...
1권만 읽고 말까 고민도 하긴 했는데, 워낙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시리즈라, 후속작을 한 번쯤은 시도해볼 것 같긴 하다.
한 가지 좋았던 건 꽤 중요한 역할로 나오는 '러너'의 리더가 '민호'라는 이름을 가진 동양인으로 나온다는 거다. 이 소년의 국적이 언급되진 않았지만, Minho라는 이름은 누가 봐도 한국 사람 아니던가! 더군다나 영화에서도 한국계 배우인 이기홍이 민호 역을 맡았다. 한국 배경의 책이 아닌데도 한국 이름이 책에 계속 언급되는 게 괜히 좋았다. (더군다나 나는 오디오북으로도 들었는데, 영어의 바다 속에서 계속 들려오는 '민호'라는 이름이 괜스레 기분 좋았다.)
다만, 책 속에서 이 청소년들의 이름은 역사 속 천재들의 이름을 따와서 지은 거라는 설정이 나온다. 예를 들어 주인공 토마스는 에디슨 토마스에서 따온 것이고, 다른 등장인물인 뉴트는 아이작 뉴턴, 알비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런데 '민호'라는 이름이 연상되는 역사 속 천재가 있었던가... 만일 저자가 한국에 대해서 잘 알았더라면(그리고 '민호'가 정말로 한국계라는 설정이었다면), 영실(장영실)이나 세종, 장춘(우장춘) 등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출처: 교보문고
영어 원서 표지. 거대한 미로의 벽이 보인다. 뭔가 인위적이면서 음산한 분위기가 책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출처: 다음 영화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