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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Aug 07. 2021

세상이 미쳤거나, 내가 미쳤거나

마더 나이트 by 커트 보니것

전쟁은 끝났지만 악몽은 계속된다.


캠벨은 미국인이지만 어려서부터 독일에서 자랐기 때문에 독일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했다. 글솜씨도 뛰어나서 그는 극작가로 크게 성공했고, 아름다운 독일 여배우와 결혼해서 행복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의 삶은 큰 전기를 맞게 되는데.


1961년. 아무도 모르게 미국으로 돌아와 혼자서 숨어 지내고 있던 캠벨은 당국에 적발이 되고, 이스라엘로 송환되어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독일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반 유대주의와 나치즘을 선전하는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당연히 유죄. 

그런데 성공한 극작가였던 그가 어쩌다가 이런 죄를 저질렀냐고?


사실 그는 미국의 첩보원이었다. 그가 방송에서 떠들어댔던 것은 유대인을 저주하고 나치를 칭송하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은 그 안에 미국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 암호화되어 숨어있었던 것. 그가 은밀히 전해준 이런 정보 덕분에 미국은 전쟁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죄인가? 이 책은 이스라엘의 어느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는 캠벨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쓰는 회고록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전쟁은 진작에 끝났지만 전쟁의 악몽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출처: 교보문고

나치 상징과 그 위에 죽은 듯 누워있는(떠 있는?) 사람. 마음에 드는 표지다.



죄책감.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명한 실존 인물 중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라는 사람이 있다. 나치 고위관리였던 그는 유대인 집단학살 정책 가담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탈출하여 숨어 지내다가 이스라엘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1961년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그가 재판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이었다. 그가 체포된 뒤 많은 이들이 그의 재판을 지켜봤는데, 이들은 모두 그의 유죄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증거가 차고 넘쳤으니까. 그런데 막상 재판장에 나타난 아이히만은 굉장히 차분하고 담담했다. 그는 수천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후회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당당한 목소리로 자신은 그저 상부의 지시를 성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울며불며 죄를 뉘우치고, 선처해달라며 빌기를 바랐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당당한 모습에 놀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했다.*)


내가 그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책 <마더 나이트>에 아돌프 아이히만이 잠깐 스쳐가듯 나오기 때문이다. 1961년,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던 이 책의 주인공이자 가공의 인물인 캠벨은, 마찬가지로 감옥에 갇혀 있던 아이히만과 마주할 기회가 생긴다. 물론 각자 독방에 있기 때문에 아주 잠깐 마주친 것뿐이지만.


이 책에서도 아이히만은 수천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다. 반면 미국의 첩보원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캠벨은 그럼에도 자신의 방송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피해가 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두 사람 모두 누군가의 죽음에 동조했고, 두 사람 모두 상부의 지시를 따랐고, 두 사람 모두 (각자가 믿기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두 사람의 차이점은 바로 죄책감의 여부다.



출처: 교보문고  

영어 원서 표지.



커트 보니것의 수작


지금까지 커트 보니것의 책은 <타이탄의 미녀>와 단편집인 <웰컴 투 몽키 하우스>를 읽었는데, 내게는 <마더 나이트>가 단연 최고였다. 지나치게 허황되지도 않고, 적당하게 현실을 드러내면서 그 안에 위트와 풍자가 양념처럼 잘 버무려져 있다. 블랙 유머의 대가로 알려진 그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마더 나이트>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전쟁 소재이고, 회고록 형식이긴 하지만 책이 지루하다거나 잔인하지 않다. 놀랄 만큼 가벼우면서도 무겁고,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다. 누군가 커트 보니것의 책을 한 권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이 책을 권할 것이다.




미국에서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닉 놀테 주연.

출처: 위키피디아

참고: 다음 영화


* 각주) 미국 정치학자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취재한 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 책에서 처음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 결여'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즉, 악의 근원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엄청나게 악한 사람만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방심하면 누구나 - 심지어는 그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 즉, '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출처: 다음 백과





나를 깨우는 말들


1.

I am an American by birth, a Nazi by reputation, and a nationless person by inclination. (p. 2)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고, 사람들은 날 나치라고 부르지만, 내 성향은 무국적자예요.


2.

“You are the only man I ever heard of,” Mengel said to me this morning, “who has a bad conscience about what he did in the war. Everybody else, no matter what side he was on, no matter what he did, is sure a good man could not have acted in any other way.” (p. 16).

멘겔이 오늘 아침 내게 말했다. "전쟁 중에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당신이 유일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전쟁 중 어느 쪽에 있었건 상관없이,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건 상관없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확신하거든요."


전쟁 중에는 많은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침략한 쪽에서도, 반격하는 쪽에서도, 나중에 돌아본다면 분명히 후회할 만한 행동들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어쩔 수 없었어. 그때는 전시였잖아. 모두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위해. 승리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그들은 속죄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3.

“The arts, the arts, the arts—” he said to me one night. “I don’t know why it took me so long to realize how important they are

....

“You’ve got to write again,” he said. “Just as daisies bloom as daisies and roses bloom as roses—you must bloom as a writer and I must bloom as a painter. (p. 57)

"예술, 예술, 예술." 어느 날 밤 그가 내게 말했다. "예술이 이렇게나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어."

...

"당신은 다시 글을 써야 해." 그가 말했다. "데이지가 데이지 꽃을 피우듯, 장미가 장미꽃을 피우듯. 당신은 작가로 꽃 펴야 하고, 난 화가로서 꽃 펴야 해."


4.

“Do you feel that you’re guilty of murdering six million Jews?” I said.

“Absolutely not,” said the architect of Auschwitz, the introducer of conveyor belts into crematoria, the greatest customer in the world for the gas called Cyklon-B.



“You were simply a soldier, were you—” I said, “taking orders from higher-ups, like soldiers around the world?” (p. 166).

"6백만 명의 유태인을 죽인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나요?" 내가 말했다.

"절대 안 느껴요." 아우슈비츠를 설계하고, 소각장으로 시신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하고, 싸이클론 B라는 독가스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구매했던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

"당신은 그저 군인이었다는 거군요. 당신은 세상 모든 군인들이 그러듯이 그저 상부의 지시와 명령을 따른 것뿐이군요?" 내가 말했다.


유태인을 죽이는 데 쓸데없이 최선을 다 한 아돌프 아이히만. 그에게는 죄책감이 없다. 그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그저 하란대로 했을 뿐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했을 뿐이다. 

사실 요즘도 다들 그렇게 말하지 않나. 여러분은 각자의 자리에서 생업에 최선을 다 하라고. 어른 말에 토 달지 말라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5.

But I’ve always known what I did. I’ve always been able to live with what I did. How? Through that simple and widespread boon to modern mankind—schizophrenia. (p. 180).

하지만 나는 내가 저지른 짓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잘 살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 현대 인류가 가지고 있는 그 간단하고도 널리 퍼진 혜택 덕분이지. 바로 조현병.


그는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이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냐고? 그건 바로 조현병 덕분이다. 세상이 미치거나, 아니면 내가 미치거나. 




제목: 마더 나이트

원서 제목: Mother Night

저자: 커트 보니것 (Kurt Vonnegut)

옮긴이: 김한영 옮김

출판사: 문학동네

특징: 닉 놀테가 주연을 맡아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음.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김한영 님의 번역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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