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이삭금 Aug 28. 2021

서툴게 덮어버린 과거의 잘못. 다시 열어볼 수 있을까?

사라의 열쇠 by 타티아나 드 로즈네

다시 돌아가야 해. 동생에게로.


1942년 7월, 프랑스.


한 밤중에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경찰이 찾아왔다. 유태인들을 잡아갈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터라, 아빠는 미리 지하에 숨은 상태. 여자는 안 잡아갈 거야. 아이들도. 더군다나 이 아이들은 프랑스에서 태어났는 걸. 프랑스 사람인데,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밖에서 모든 가족이 다 나오라고 말하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린다. 겁에 질린 4살 남동생이 벽장에 숨는다. 이 벽장 입구는 잘 막혀 있어서, 그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10살 누나 사라는 얼른 물 한 컵을 넣어주고, 동생에게 곧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한 후 벽장문을 잠갔다.


엄마는 겁에 질려 정신이 반쯤 나갔다. 엄마의 비명소리를 듣고 지하에 숨어있던 아빠도 나와 버렸다. 비겁하게 가족들만 보낼 수는 없으니까.


곳곳에서 경찰에 이끌려 유태인들이 잡혀왔다. 이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빠가 묻는다. "네 동생은?" 걱정 마세요. 벽장 속에 있어요. 사라는 자랑스레 열쇠를 들어 보인다. 아빠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제야 사라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다시 올 수 있는 거 맞죠? 동생은... 동생은 어떡하죠?

사라는 주머니 속 열쇠만 꼭 움켜쥐었다.

이들을 아우슈비츠로 데려갈 기차가 곧 도착했다.



출처: 교보문고

한국어 번역판 표지. 어린 소녀와 문, 열쇠 구멍. 제목과 제법 걸맞은 멋진 표지다. 책에서 사라가 열쇠로 잠근 것은 눈에 띄지 않는 벽장문이었기 때문에, 표지에 나온 빨간 문은 그 벽장문은 아닌 것 같다. 저 문은 뭘 상징하는 걸까? 동생에게로 가는 문? 과거로 연결된 문? 표지의 문이 상징하는 바를 각자 유추해보는 것도 좋을 듯.





2002년 프랑스 파리


미국인 줄리아는 프랑스 남편과 결혼해서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그녀는 잡지에 싣기 위해 1942년 파리에서 있었던 유명한 유태인 징용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이름하여 '벨디브 검거 사건(Vel' d'Hiv)'. 파리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을 모두 체포해서 동계 경륜장에 가뒀다가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린 사건이다.


독일의 압박과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나 당시 파리에서 유태인 징용을 진두지휘하고 관리를 한 것은 프랑스 경찰이었다. 이때 프랑스 태생이어도, 즉 프랑스 국민이어도 혈통이 유태인이면 모두 잡아갔는데, 결론적으로는 프랑스 경찰이 프랑스 국민을 잡아서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린 셈이 되어 후에 논란이 되었다.


더 참담한 사실은 이 당시 잡혀간 이들이 1만 3천 명이 넘었는데, 성인 남자보다 성인 여자가, 성인 여자보다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점이다. 유태인을 잡아갈 거라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졌었는데, 성인 남자만 데려갈 줄 알고 어른 남자들이 많이 숨었기 때문. 아무런 죄 없는 자국민을, 그것도 여성들과 어린아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여 죽게 했다는 점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이 사건을 크게 다루지 않고 있었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아이들의 죽음. 줄리아는 60년 전에 일어났던 이 사건을 조사하다가 자신의 시댁과 이 사건이 묘하게 얽혀 있다는 걸 알아낸다.


과연 60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였을까? 프랑스 국민임에도 프랑스 경찰에 붙잡혀 한밤중에 집을 떠나야 했던 열 살 소녀, 사라. 줄리아는 그녀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꼭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출처: 교보문고   

영어 원서 표지. 이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화 포스터를 책 표지로 옮겨놨다.




책을 읽다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 과거를 잊은 사람, 과거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사람, 과거를 잊고 싶은 사람. 과거를 기억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책을 읽으며 내내 우리의 과거도 되돌아보게 만든다.



2010년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출처: 다음 영화





나를 깨우는 말들


1.

벨디브 검거 사건을 기억하고 있던 한 할머니. 그 당시 할머니도 아주 어린 소녀였던지라 유태인들이 잡혀가는 걸 그저 방관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할머니는 사람들이 그 사건을 잊어가는 걸 기자인 줄리아에게 한탄하는데.


“Shame on us all for not having stopped it.”
“You didn’t know,” I said softly, touched by her sudden watery eyes. “What could you have done?”
“Nobody remembers the Vel’ d’Hiv’ chidren, you know. Nobody is interested.”
“Maybe this year they will,” I said. “Maybe this year it will be different.”
She pursed her shrunken lips. “No, you’ll see. Nothing has changed. Nobody remembers. Why should they? Those were the darkest days of our country.”

"그 일을 막지 못했던 우리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
"할머니는 모르셨었잖아요." 할머니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는 걸 보며 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뭘 하실 수 있었겠어요?"
"벨디브 사건의 아이들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아무도 관심이 없어."
"어쩌면 올해는 기억할지도 모르죠." 내가 말했다. "어쩌면 올해는 다를지도 몰라요."
할머니는 주름진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니. 이제껏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왜 기억하겠니? 우리나라의 가장 어두운 나날들인데."


아무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2.

1942년. 많은 유태인들이 한꺼번에 수용소로 잡혀갔다. 당연히도, 그들이 살던 많은 집들이 한꺼번에 빈 집이 됐다. 그러자 남아있던 독일 사람들이 그 빈 집들을 차지했다.

주인공 줄리아는 자신의 시부모님이 살던 옛 집이 유태인이 잡혀가고 난 빈 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 남편은, 그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I felt my face go hot. My voice echoed out through the empty apartment.
“But doesn’t it bother you that your family moved in, knowing that Jewish people had been arrested? Did they ever tell you about it?”
I could almost hear him shrug in that typical French fashion, the downturn of the mouth, the arched eyebrows.
“No, it doesn’t bother me. I didn’t know. They never told me. But it still doesn’t bother me. I’m sure lot of Parisians moved into empty apartments in July of 42, after the round-up. Surely that doesn’t make my family collaborationists, doesn’t it?”
His laugh hurt my ears.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는 중인 사라)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 목소리가 빈 아파트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유태인들이 잡혀갔다는 걸 알고도 그 집으로 이사해왔다는 게 자기는 신경 쓰이지 않아?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못 들었어?"
남편은 분명 전형적인 프랑스 스타일로 어깨를 으쓱하고 있을 거다. 눈썹을 모으고 입을 삐죽인 채.
"아니,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데. 난 몰랐잖아. 아무도 나한테 말해준 적도 없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경 쓰이지는 않아. 1942년 7월에 유태인들을 대규모로 잡아간 이후에, 분명 수많은 파리 사람들이 빈 아파트로 이사 들어왔을 거야. 그게 우리 가족을 나치 부역자로 만드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남편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때는 모두가 다 그랬으니까, 괜찮은 걸까? 그때는 몰랐으니까. 그때는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그때는, 그때는, 그때는.


3.

“Victims of the Nazis.”

Below we discovered the same names engraved on the tomb in the cemetery. The Vel’ d’Hiv’ children who had died in the camp.
“Victims of the Nazis again,” muttered Bamber. “Looks like a good case of amnesia to me.”

"나치의 피해자들"
...
그 아래 공동묘지의 무덤에 새겨진 이름들은 (아까 봤던 것과) 같은 이름들이었다. 수용소에 끌려와 죽었던 '벨디브'의 아이들.
"여기도 나치의 피해자라고 쓰여있네요." 뱀버가 투덜거렸다. "다들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나."


물론 이 아이들은 시대의 희생양이고, 근본적으로는 나치의 피해자가 맞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들을 죽음 앞에 끌고 가 무릎 꿇린 것은 프랑스였다. 하지만 기념비에도, 묘비에도, '프랑스'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프랑스의 피해자'이기도 할 텐데. 모두들 편리한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걸까?



4.

사라진 유태인 소녀(지금은 할머니가 됐겠지만) 사라를 찾아 나선 주인공 줄리아. 아무런 상관도 없는 미국인이 왜 유태인을 찾으려 하냐고, 왜 미안한 감정을 갖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Gaspard Dufaure had been surprised at my doggedness.
“Why find her? What for?” he had asked, shaking his grizzled head. I had replyed, “To tell her we care. To tell her we have not forgotten.”
“We?” he has smiled. “Who is the ‘we’?”
“My family-in-law, the French people.” And then I retorted slightly irritated by his grin. “No, me. Just me. I wanted to say sorry. I wanted to tell her I could not forget the round-up, the camp, Michel’s death, and the direct train to Auschwitz that had taken her parents away forever.”
“Sorry for what?” he had retaliated. Why should I, an American, feel sorry? Hadn’t my fellow country men freed France in June 1944? I had nothing to be sorry for, he laughed.
I had looked at him straight in the eyes. “Sorry for not knowing. Sorry for being 45 years old and not knowing.

내 끈질김에 가스파르 듀포르는 놀랐었다.
"왜 그녀를 찾으려고 하는 거지? 뭐하러?" 그는 덥수룩한 머리를 흔들며 물었었다. 난 대답했다. "우리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말해주려고요. 우리가 잊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려고요."
"우리라고?" 그가 미소 지었다. "'우리'가 누군데?"
"내 시댁 식구들, 프랑스 사람들이요." 그리고는 그의 미소가 살짝 거슬려서 대꾸했다. "아뇨, 저요. 그냥 저 혼자요.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유태인을 잡아간 사건, 수용소, 남동생의 죽음,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을 영원히 앗아간 아우슈비츠행 직행 기차까지, 내가 그 모든 걸 다 잊을 수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뭐가 미안한대?" 그가 맞받아쳤다. 왜 내가, 그것도 미국인이,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거지? 미국인들은 1944년 6월에 프랑스를 해방시켜주지 않았나? 넌 미안해할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가 웃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몰랐던 게 미안해요. 마흔다섯이나 먹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미안해요."  


우리 지난날에도 이렇게 사죄해야 할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

모르고 있어서, 알려고 하지 않아서, 관심 두지 않아서, 미안해요.

이제는 관심 가질게요.

이제는 잊지 않을게요.

미안해요.


5.

Zakhor. Al Tichkah.
Remember. Never forget.

기억해. 절대 잊지 마.


사라가 남긴 편지에 있던 말. 첫 두 문장은 히브리어다.



6.

“What Julia did was pathetic. Bringing back the past is never a good idea. Especially whatever happened during the war. No one wants to be reminded of that. Nobody wants to think about that.”

"줄리아가 한 짓은 정말 한심해요. 과거를 들추는 건 절대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요. 특히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라면 더욱이요. 아무도 그건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아무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요."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다 건너에도. 이 땅에도.






제목: 사라의 열쇠

원서 제목: Sarah's Key

저자: 타티아나 드 로즈네 (Tatiana de Rosnay)

옮긴이: 이은선 옮김

출판사: 문학동네

특징: 2010년 프랑스에서 <사라의 열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이은선 님의 번역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상하고재미있는 반전(反戰) SF소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