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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Aug 21. 2021

요상하고재미있는 반전(反戰) SF소설

제5도살장 by 커트 보니것

복잡하고 독특한 플롯


이 책은 커트 보니것 소설 중 가장 대중적인 소설로, 풍자와 블랙 유머가 가득한 반전(反戰) SF 소설이다. 반전 소설이라고 하면 전쟁의 참상을 가슴 시리도록 슬프게, 혹은 안타깝게 그리는 걸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특하게도 SF라는 형식을 빌어왔다. 반전 메시지도 미치도록 슬프다기보다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하는 풍자를 통해 전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2차 세계대전 참전 중에(군인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자면 군목자의 조수였다) 포로로 붙잡힌다. 그가 갇힌 포로수용소는 비어 있던 도살장 건물이었고, 그 건물 입구에는 '제5도살장'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그는 나중에 살아 돌아와 미국에서 살게 된다. 결혼도 하고, 돈도 벌고, 아이도 낳고.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말 못 할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시간여행을 한다는 것.


문제는 시간여행을 '언제' 떠날지 그도 모른다는 거다. 아내와 아이와 행복하게 미국에서 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눈 떠 보면 총알이 빗발치는 독일 전장에 와 있고, 독일군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다가 정신 차려보면 그는 미국에 있고, 다 장성한 딸이 아빠 정신 차리라고 말하는 식이다.


시간이 계속 바뀌며 글이 진행되기 때문에 그 점이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 독특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출처: 교보문고

한글 번역본 표지.



저자의 경험이 담긴


저자인 커트 보니것도 2차 대전에 참전을 했고, 역시 포로로 잡힌 경험이 있다. 또한 그 유명한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돌아온 소수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소설 50% + 저자의 경험담 50%' 쯤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저자의 경험이 몇 % 가미되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주인공이 포로로 잡혔을 때의 감정, 전쟁의 참상에 대한 소회 등은 날 것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여행을 한다는 게, 그래서 전쟁터와 몇십 년 후의 미국을 오간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이것보다 더 적절한 장치도 없지 않나 싶다. 안락한 삶을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마음은 전쟁의 지옥을 다시 겪고, 온 세상이 뒤죽박죽 엎어진 것처럼 보이는 상태. 거기에 지구인의 오만과 불합리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줄 외계인의 존재까지. 반전 소설이자 SF 소설이라는 그 어려운 일을 저자는 멋지게 해낸다.




출처: 교보문고

영어 원서 표지. 해골과 뼈다귀. 포로수용소 이름마저도 '도살장'. '죽음'이 강하게 느껴지는 표지.



이 책에는 So it goes라는 문장이 꽤 여러 번 나온다. 검색을 해보니 106번이나 나온다고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뭐, 그런 거지." 정도의 의미. 도대체 이 문장이 왜 이렇게나 많이 나온 걸까.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알 것만 같다. 뭔가 체념한 듯한, 혹은 달관한 듯한 느낌. 산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닐까. 인생이란 게 다 그렇지.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세상사가 모두. 뭐 그런 거지.



출처: 다음 영화


1972년에 <죽음의 순례자>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나를 깨우는 말들


1.

All moments, past, present, and future, always have existed, always will exist. (p. 29).

모든 순간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항상 존재해왔고, 항상 존재할 거야.



2.

They had both found life meaningless, partly because of what they had seen in war. Rosewater, for instance, had shot a fourteen-year-old fireman, mistaking him for a German soldier. So it goes. And Billy had seen the greatest massacre in European history, which was the fire-bombing of Dresden. So it goes.

So they were trying to re-invent themselves and their universe. Science fiction was a big help. (pp. 104-105)

그들은 둘 다 인생이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에는 전쟁에서 겪은 일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로즈워터는 14살 먹은 어린 소방관을 독일 병사로 오인해서 총으로 쐈다. 뭐 그런 거지. 그리고 빌리는 드레스덴 대공습이라는, 유럽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대량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 뭐 그런 거지.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그들이 사는 우주를 다시 창조해내려고 애썼다. 거기에 공상과학 소설이 큰 도움이 됐다.



3.

dead to the world는 '의식을 잃은'이라는 뜻이다. 


“How’s the patient?” he asked Derby.
“Dead to the world.” 
“But not actually dead.”
“No.”
“How nice—to feel nothing, and still get full credit for being alive.” (p. 109)

"환자는 좀 어떤가요?" 그가 더비에게 물었다.
"죽은 거나 진배없어요."
"하지만 진짜로 죽은 건 아니죠?"
"아니에요."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아무것도 못 느끼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거니까요."


이 부분을 읽고 든 생각 하나. 아니, 이게 멋질 일인가.

그다음으로 떠오른 생각.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걸까. 분명 살아는 있지만 세상에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는 사람들. 병실에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멀쩡히 돌아다니면서도,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



4.

We had forgotten that wars were fought by babies. When I saw those freshly shaved faces, it was a shock. ‘My God, my God—’ I said to myself, ‘It’s the Children’s Crusade.’” (p. 109).

우리는 아기들이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갓 면도한 얼굴들을 봤을 때 그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나는 혼잣말을 했다. "이건 소년 십자군이잖아."


실제로 13세기에 있었던 소년 십자군은 주로 12~13세의 어린 청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저렇게 어린아이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일념 하에 전장으로 나선다는 게 상상이나 갈까.

그런데.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던 군인들은 과연 '어른'이었을까? 어려서는 '군인 아저씨'라 불렀던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 보니 기껏 이십 대인 청년들이었다. 군데군데 여드름 자국, 갓 면도한 뽀송한 얼굴. 총 한 자루 받아 들고 전쟁터로 내몰렸던 그 어린 병사들. 이것이 소년 십자군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5.

저자는 소설 속에서 '외계인'의 눈을 빌어 기독교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 이 책이 한국 작가가 쓴 한국 소설이라면 당장 기독교계가 들고일어났을 상황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뭐, 미국이라고 달랐을까? 찾아보니 책 출간 이후 몇몇 주에서 이 책이 금서가 된 적이 있다. '과도한 성적 장면, 폭력, 무례한 언어' 등의 이유로. 물론 반 기독교적이라는 비판도 수두룩하게 받았고.

하지만 이 책이 커트 보니것의 책들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책이라는 점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저자의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겠지? 저자가 기독교를 어떻게 위트 있게 비판하고 있는지, 그 대목을 읽어보고 직접 판단해 보시길.


The visitor from outer space made a serious study of Christianity, to learn, if he could, why Christians found it so easy to be cruel. He concluded that at least part of the trouble was slipshod storytelling in the New Testament. He supposed that the intent of the Gospels was to teach people, among other things, to be merciful, even to the lowest of the low.
But the Gospels actually taught this:
Before you kill somebody, make absolutely sure he isn’t well connected. So it goes.

• • •

The flaw in the Christ stories, said the visitor from outer space, was that Christ, who didn’t look like much, was actually the Son of the Most Powerful Being in the Universe. Readers understood that, so, when they came to the crucifixion, they naturally thought, and Rosewater read out loud again:
Oh, boy—they sure picked the wrong guy to lynch that time!

And that thought had a brother: “There are right people to lynch.” Who? People not well connected. So it goes.

• • •

The visitor from outer space made a gift to Earth of a new Gospel. In it, Jesus really was a nobody, and a pain in the neck to a lot of people with better connections than he had. He still got to say all the lovely and puzzling things he said in the other Gospels.
So the people amused themselves one day by nailing him to a cross and planting the cross in the ground. There couldn’t possibly be any repercussions, the lynchers thought. The reader would have to think that, too, since the new Gospel hammered home again and again what a nobody Jesus was.
And then, just before the nobody died, the heavens opened up, and there was thunder and lightning. The voice of God came crashing down. He told the people that he was adopting the bum as his son, giving him the full powers and privileges of The Son of the Creator of the Universe throughout all eternity. God said this: From this moment on, He will punish horribly anybody who torments a bum who has no connections! (p. 112~113).


왜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쉽게 잔인해지는지 알고 싶어서 어느 외계인이 기독교에 대해 심각하게 연구했다. 그는 그 이유가 어느 정도는 신약성서의 스토리텔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외계인은 복음의 의도가, 물론 다른 것도 있겠지만, 사람들에게 자비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하지만 복음이 실제로 가르쳐준 것은 다음과 같았다.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는 그가 어마어마한 빽이 있는 건 아닌지 확실히 알아두라고. 뭐 그런 거지.

...

외계인은 말했다. 이 예수님 이야기에서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별 볼일 없어 보이던 예수님이 사실은 전 우주에서 가장 막강한 존재의 아들이었다는 점이다. 독자들도 그 사실을 이해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았을 당시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로즈워터도 그 부분을 크게 소리 내어 읽었다.

이런, 제길. 린치 할 사람을 잘못 골랐잖아!

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린치 해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거지." 누구냐고? 어마어마한 빽이 없는 사람들. 뭐 그런 거지.

...

외계인은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서 지구인들에게 선물로 줬다. 그가 쓴 새 성서에는 예수님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나온다. 연줄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사람. 그 예수님은 진짜 성서에서 한 것처럼 여전히 멋지고 알쏭달쏭한 복음들을 말하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십자가를 땅에 세웠다. 린치를 가한 사람들은 생각했다. 별일 없을 거야. 독자들도 똑같이 생각할 거다. 왜냐하면 성서에서는 계속해서 예수님이 아무런 빽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주지 시키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때,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죽기 바로 직전에, 하늘이 열리고 천둥번개가 내려친다. 신의 목소리가 땅에 내리 꽂힌다. 신은 사람들에게 이 죽어가는 이를 지금 자신의 양자로 입양한다고, 그에게 전지전능한 신의 아들로서 모든 권세와 특권을 영원토록 내려줄 거라고 말했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어떠한 빽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이를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아주 끔찍한 벌을 내리겠노라!

그렇다. 외계인이 보기에, 성서의 문제는(더불어 기독교의 문제는) '린치한 사람이 알고 보니 하느님 아들이었네? 이런! 앞으로는 아무런 빽 없는 사람을 린치 하자.'라는 걸 은연중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계인이 새로 쓴 성서에서는 신이 이 점을 명확히 한다. 아무런 빽 없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괴롭히지 마! 내가 언제 누구를 양자로 입양할지 모르니까.





제목: 제5도살장

원서 제목: Slaughterhouse 5

저자: 커트 보니것 (Kurt Vonnegut)

옮긴이: 정영목 옮김

출판사: 문학동네

특징: 1972년 <죽음의 순례자>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정영목 님의 번역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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