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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Oct 09. 2021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블랙 라이크 미 by 존 하워드 그리핀

역지사지를 실천했던 백인


흔히들 말한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모른다고. 우리가 시시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빙의할 수는 없는 일이라, 우리는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어떨까?”라고 상상해보며 그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 그 역지사지를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1959년. 노예 해방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흑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보란 듯이 난무했던 시대. 텍사스 출신의 백인 존 하워드 그리핀은 “만일 백인이 흑인이 된다면 어떤 삶의 변화를 겪게 될까? 자신의 선택이 아닌, 타고난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당한다는 건 어떤 걸까?”라는 질문에 몸소 답을 내려보기로 한다.


그는 피부과 전문의를 찾아 피부에 색소 침착을 시키는 약을 처방받아 먹고, 며칠간 기계로 강한 자외선을 쬐서 피부의 색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자라는 부분(눈 가장자리나 입가 등)은 어두운 화장품을 덧발라주었다. 꽤 고통스럽고 건강에도 위험할 수 있는 실험이었지만, 그는 굳건한 의지로 이 모든 것을 감내해낸다.


그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하고, 존은 약 50일간 도보 여행을 떠난다. 평생 백인으로 살아왔지만 지금은 흑인의 외양을 한 채, 흑인 차별이 심각했던 미국 남부를 향해.



출처: 교보문고

머리까지 짧게 깎은 그는 겉보기에는 완전 흑인이 되어 있었다.




흑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인종차별을, 처음으로 당하다


겉모습은 완전히 흑인이 됐다. (그는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가 아니었기에 머리마저도 아주 짧게 잘라버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도, 전부 흑인의 것이었다.


본격적인 여행을 떠나기 위해 버스표를 사려던 존은 우선은 자신이 가진 수표를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은행은 이미 문을 닫은 시간. 그는 전에 늘 하던 대로 근처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며 수표를 바꾸려 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 백인일 때는 아주 쉬운 일이었는데, 어디에서 훔쳤을지도 모르는 흑인의 수표는 함부로 바꿔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그는 이제 아무 식당에서나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 화장실이나 쓸 수 없었다. 그가 변장을 한 백인이라는 걸 알게 된 한 흑인은 존에게 충고를 해줬다. 절대로 백인 여자를 쳐다보지 말라고. 심지어 영화 포스터조차 쳐다보지 말라고. 그러면 분명 다른 백인들이 시비를 걸어오니까. “너 백인 여자를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라며.


고속버스를 타고 더 깊은 남부로(즉, 흑인 차별이 더욱 심각한 곳으로) 내려가게 됐다. 버스의 앞쪽은 백인 전용, 뒤쪽은 흑인 전용이었다. 버스가 한참 달려 한 휴게소에 도착하자, 승객들은 화장실에도 가고 다리도 스트레칭할 겸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앞쪽의 백인 승객들이 다 내리고 뒤쪽의 흑인 승객들이 내리려 하자 운전기사가 문을 막는다. 버스에서 내릴 수 없다고.


휴식시간이 끝나면 다시 버스를 출발시키기 전에 미처 돌아오지 않은 승객들을 모으러 다녀야 하는데, 자신은 흑인들을 데리러 돌아다니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쩔 수 없이 존을 포함한 흑인 승객들은 터질 듯한 방광과 함께 버스에 남아 있어야 했다. (감히 백인에게 대항할 사회 분위기가 아니다.)




출처: 교보문고




대놓고 하는 차별, 은근히 하는 차별, 한 겹밖에 안 되는 차별.


흑인으로 변장한 이후 항상 대놓고 차별을 받았지만, 은근히 차별을 받을 때도 있다. 존은 백인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 항상 적의에 찬 표정으로 노려보거나 깔본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그들에게 다가가 “저기요, 제가 뭐 실수했나요?”하고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는 실수한 게 없었다. 있다면 자신의 ‘피부색’이 실수한 거겠지.


욕하고 때리는 게 아니어도 경멸에 찬 표정으로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위축시켰다. 그런 일이 어딜 가나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그가 한 흑인 마을에 머물게 됐을 때 존은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우울함과 좌절감에 기가 죽었다. 행복하고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거부된 이 사람들의 마을은 그 우울함에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개처럼 살고 있다며 경멸했지만, 존은 흑인의 삶을 경험하고 흑인 밀집 지역에 머무르며 깨달았다. 기본적인 행복과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남은 건 크게 소리 지르고 술에 취하는 것, 섹스와 먹는 것에 탐닉하는 것뿐이라는 걸.


여행 말미, 피부 색소 침착을 위해 그간 복용했던 약을 중단하자 그 효과가 떨어지며 피부색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그는, 덧바른 화장품을 지워내며 빡빡 문질러 세수를 하고 옷을 단정히 입으면 피부가 약간 탄 백인으로 보였고, 어두운 화장품을 덧칠하면 흑인으로 보였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화장실에서 백인과 흑인으로 변신을 해가며 마지막 실험을 한다.


그는 이틀에 걸쳐 같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백인의 외양일 때는 들어가서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흑인으로 갔을 때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자신은 어제와 같은 사람인데, 어제는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할 수 없다.


그가 차별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어리석고 무지해서? 더럽고 시끄러워서? 흑인이라서? 단지 피부색이 어두워서?





두려운, 책의 반향


책이 나오자, 당연하지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그의 실험에 분개한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그와 가족을 위협했다. 그는 자신과 부모님 댁에 경찰의 신변보호 요청을 해야 했고, 급기야는 조금 더 안전한 달라스 지방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좋은 변화도 있었다. 사람들이 흑인 차별에 조금 더 눈을 뜨고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아직 첫걸음에 불과했다. 지역사회의 일을 결정할 때 종종 그를 초대해서, 이곳에서 흑인을 존중하고 흑인 차별을 없애려면 어떤 조치가 취해지면 좋을지 그에게 묻곤 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백인인 나에게 묻지 말고, 이 지역사회에 있는 흑인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이런 문제를 결정할 때조차, 그들은 흑인은 배제한 채 '백인이 생각하는 흑인에 대한 처우 개선'을 논했던 것이다.


존이 이 실험을 했던 것은 1959년이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더 흘렀다. 그래서. 지금은 달라졌을까? 당장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BLM 운동이 촉발된 게 작년이다. 이 책을 읽는 마음이 착잡한 이유는, 이게 과거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나를 깨우는 말들


1.

“Don’t stir up anything. Let’s try to keep things peaceful.” (p. 5).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마. 모든 걸 평화롭게 유지해보자고.”


문제는 이미 발생했다. 너무 오래돼서 곪을 대로 곪아버린 상태로. 그런데 그 사실을 지적하기만 하면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란다.

가진 자들은, 누리는 자들은, 위에 있는 자들은. 늘 그런 식이다.



2.

“You can’t do like you used to when you were a white man. You can’t just walk in any place and ask for a drink or use the rest room.” (p. 23)

“당신이 백인이었을 때처럼 행동할 수 없어요. 아무 데나 막 들어가서 음료수를 달라고 하거나 화장실을 쓸 수가 없다고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 식당에서나 주문할 수 없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 화장실이나 쓸 수 없다. 만일 당신이 흑인이라면.



3.

일부 백인들이 흑인을 도와주고 흑인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아주 '올바르고 품위 있는 행동을 하자(do the decent and right thing)'는 주장을 하면, 다른 백인들은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했다. 아니, '올바르고 품위 있는 행동'을 하는 게 왜 공산주의야?


“We’ve reached a poor state when people are afraid that doing the decent and right thing is going to help the communist conspiracy,” (p. 37)

"사람이 올바르고 품위 있는 행동을 하면 그게 공산주의를 돕는 거라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런 몹쓸 상황에 도달했다."


음. 이게 1959년도 일이라고? 60년도 더 된, 두 세대 이전의 이야기라고?

'올바르고 품위 있는 행동'을 하자는 말에 무턱대고 종북 프레임을 씌우는 걸 얼마 전에도 봤던 것 같은데.



4.

I read, realizing that a few days earlier I could have gone in and ordered anything on the menu. But now, though I was the same person with the same appetite, the same appreciation and even the same wallet, no power on earth could get me inside this place for a meal.



“You can live here all your life, but you’ll never get inside one of the great restaurants except as a kitchen boy.” (p. 38).

(흑인은 못 들어온다는 안내문을) 읽으면서, 나는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곳에 들어가서 메뉴에 있는 건 뭐든지 다 주문할 수 있었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비록 내가 그때와 같은 입맛과 같은 식성, 심지어 같은 지갑을 가진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저 안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도, 근사한 음식점 안으로는 절대 못 들어갈 거예요. 부엌에서 잡일을 돕는 일꾼으로 가는 거라면 몰라도.”



5.

I looked up to see the frowns of disapproval that can speak so plainly and so loudly without words. The Negro learns this silent language fluently. (p. 38)

나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찡그린 인상을 바라봤다. 말이 없어도 너무나 확연히, 너무나 큰 소리로 드러나는 불만의 목소리를 담은 얼굴 표정들. 흑인들은 이런 ‘조용한 언어’를 꽤 유창하게  배운다.



6.

They judged me by no other quality. My skin was dark. That was sufficient reason for them to deny me those rights and freedoms without which life loses its significance and becomes a matter of little more than animal survival. (p. 99)

그들은 나를 다른 걸로 판단한 게 아니다. 내 피부색은 어두웠다. 그거면 된 거다.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삶이 아닌,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권리와 자유를 그들은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단지 내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7.

프로젝트를 잘 끝마치긴 했는데, 과연 이 내용을 책으로 내도 될까?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남부를 누볐다는 내용. 백인일 때와는 피부에 와닿게 현저히 다른 취급을 받았던 경험. 이 내용이 드러나면 살해 위협을 받을 게 분명하다.

흑인 분장을 하고 남부를 누빈 것도 위험천만했지만, 책을 출간하는 순간 그는 전국적으로 위험해질 것이다.


“It’ll cause trouble,” he said. “ We don’t want to see you killed. What do you think? Hadn’t we better forget the whole thing?” (p. 139)

“문제가 생길 거야.” 그가 말했다. “네가 살해당하면 안 되잖아. 이 프로젝트를 그냥 덮어버리는 게 어때?”






제목: 블랙 라이크 미

원서 제목: Black Like Me

저자: 존 하워드 그리핀 (John Howard Griffin)

옮긴이: 하윤숙 옮김

출판사: 살림

종류: 비소설. 에세이.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하윤숙 님의 번역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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