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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령 Aug 12. 2024

건물 사이에 피어난

'혐오의 혐오'에 대한 아주 짧은 이야기

오래 살다 보면 아주 참 이상한 일이 많지.


백발의 노인이 유모차처럼 생긴 보행기를 끌고 나오며 중얼거린다. 주택가의 골목길 사이사이에 이제 막 새벽 어스름이 밝아온다. 골목길을 지나기에 버거워 보이는 쓰레기 수거 차량 후미에서 미화원 둘이 뛰어내린다. 그들은 몸에 익은 듯이 종량제 봉투를 차량에 던져 넣는다. 차량이 지나가자마자 초록색 대문에서 인상을 찌푸린 노인이 나온다. 노인의 머리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은 가만히 있어도 찌푸린 것 같이 주름졌다. 낮은 가죽 신발을 단단히 신고, 머리를 곱게 빗은 노인은 급하지 않은 작은 발걸음으로 동네 골목을 꺾어 들어간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계속 중얼거린다. 노인의 중얼거림은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 하는 말일 수도, 당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대꾸해 주는 사람 하나 없지만 노인의 말은 또렷해지고 분명해지며 점점 나와 당신의 귀에 닿는다.


골목을 하나 더 꺾어 들어가자, 노인은 멈춰서서 숨이 가쁜 듯 큰 숨을 몇 번 들이마신다. 그녀가 억지로 굽은 허리를 펴고 정면을 바라보자, 당신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노인은 보행기를 발끝으로 눌러 고정하고 유모차처럼 생긴 앞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불안한 듯 눈으로 보행기를 몇 번을 확인하고 보행기 앞쪽 자리에 앉는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이 정면을 제대로 쳐다본다. 당신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노인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노인은 숨을 한 번 더 들이마신 후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네 말이야. 혹시 운명을 믿어?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노인을 지켜본다.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까 모든 일에는 다 하늘에 뜻이 있다, 이 말이야. 인간은 다 제 분수가 있고, 제자리가 있다고. 그런데 좀 이상한 일이 있어. 들어볼 텐가?


노인은 당신을 볼 수 없지만 당신은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 맞은 편 빨간 대문 반지하 집 딸을 아는가? 알지 못할 테지. 저 집이 이 동네에 아주 오래 산 집이야. 그러니까 저 집안은 저 반지하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이 말이야.


노인은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러는 듯이 말꼬리를 늘려가며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저 집은 아버지, 아들, 딸 그렇게 셋이 살아. 저 집 엄마는 딸을 낳다가 죽었어. 아니, 그깟 딸이 대체 뭐라고, 아주.


노인은 집게손가락을 뻗어가며 말하다가, 잠시 목소리를 낮춘다.


동네 아줌마들한테 듣기로는 계획에도 없는 자식이었대. 없는 살림에 원래 하나만 낳으려고 했는데 하나가 더 생겼다고. 안 생겨야 할 애가 생긴 거야. 그렇게 자기 엄마 잡아먹고 태어난 딸이 저 반지하 집 딸이야. 나도 이 동네에 오래 살아서 그 아이를 잘 알아. 지금쯤 한 스무 몇 살쯤 됐을걸. 아아, 나는 정말 그 아이를 보면 가슴이 갑갑해. 저 복잡한 살림에 말이야.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말하다가 자세를 바꾸고 목을 빼내 좌우로 돌려가며 골목을 살피다 말한다.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그 말에 당신도 덩달아서 주변을 살피게 된다. 노인은 그런 당신이 보이지 않는지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걔 가끔 웃으면서 우리 집 앞을 지나 다닌다니까. 내가 요즘 걔를 보면 아주 깜짝깜짝 놀라요. 나한테 막 웃으면서 인사를 해. 참나. 나는 걔를 보면 속이 조금 이상해. 뭐랄까, 불편해.


노인은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한다.


제 분수도 모르고 밝으니까, 불편해. 


당신은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 동네의 옛 풍경과 노인의 인생에 대해 잠시 상상해 본다.

노인은 다시 무슨 말을 이어가려다가 혼자 손사래를 치더니 보행기에서 일어난다. 엉덩이 쪽을 손바닥으로 툭툭 털어내고 보행기를 반 바퀴 돌아 걸어서 손잡이를 잡는다. 구부정한 자세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중간에 멈춰서 빨간 대문을 한 번 쳐다본 것 말고는 멈추지 않고 초록색 대문까지 걸어간다. 당신은 빨간 대문 앞에 서서 노인이 초록색 대문에 들어갈 때까지 쳐다본다.


노인이 초록색 대문에 들어가자마자 빨간 대문에서 사람이 나온다.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이다. 당신은 그녀를 알 것만 같다. 그녀는 대문에서 나오자마자 당신과 눈이 마주친다. 당신은 왜인지 그녀의 눈을 피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지나가다가 아까 지나간 쓰레기차가 흘리고 간 쓰레기 페트병을 집어 들고 버릴 곳이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한참을 그러다가 버릴 곳이 없는지 손에 그대로 들고 있다. 나중에 쓰레기통이 보이면 버릴 생각인가 본다. 그녀는 밝아오는 햇살을 맞으며 자신이 가야할 길을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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