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럽다
게으름은 자유로움에 숨겨놓고 전날 밤이 돼서야 가는 길을 알아본다.
가는 방법은 두 가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터미널에서 탈 수 있는 버스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역을 지나가는 기차
대학교는 바닷가에서 다녔다.
꿈도 희망도 딱히 없던 십 대, 내가 가진 유일한 바람이었다.
다행히도 수능 점수도 아깝지 않게 잘 나온 것도 아니고
모자란 것도 없이 적당한 숫자가 나와서
아쉬움도 걱정도 없이 바다가 있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때는 인천에 살아서 구월동 인천 터미널에서 격주에 한 번 정도 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했다.
처음엔 미시령 터널이 개통되기 전이 어서
5시간 정도 걸렸는데, 안전벨트를 안 하고 잠이라도 들었을 때는 흔들거리는 몸이 힘껏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와 정신도 차리기 전에 다시 한번 부딪치는 머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 앉는다.
그러고 창밖을 보면 굽이굽이 진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저 멀리 설악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엔 그 5시간이 너무도 길어서 전 날 최대한 잠을 줄이고 버스에서 숙면을 취하는 방법을
선택하곤 했는데,
부작용으로는 그전에 잠들어서 혹은 뒤늦게 잠이 들어서 버스를 못 타는 경우가 생겼다.
그런 추억을 가지고도 이번엔 기차를 타고도 싶어서
지나가는 노선을 보니 동해 쪽으로 갈 수 있겠다 싶었다.
대부분이 출근할 시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가 있었고 걸리는 시간은 대략 4시간
도착하면 점심시간이었다.
책 두 권과 헤드폰과 이어폰과 간식 조금 챙겨서 기차에 탄다.
한참을 가다 보면 창문으로 바다를 볼 수 있겠지~
하면서 산과 논과 강과 돌을 보고 있으니
우리 동네와 다른 게 무엇인가 싶었다..;;
목적지는 다 와가는데 왜 바다가 안 보이지 했는데,
심지어 역 근처에는 바다도 없어서 내려서도 동네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
해산물은 있겠지 해서 점심 메뉴로 짬뽕을 골랐지만..
오징어도 없는 고기짬뽕이었다!!
맛은 있었다!!
내가 내린 곳은 "동해역"이었고, 바다를 조금 더 편하게 보려면 묵호역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줄줄이 서 있는 택시를 슬쩍 외면해 보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역 앞에 자리한 버스 정류장은 두 곳.
나는 엄청난 길치다.
노선을 미리 알아와도 어김없이 길을 잃어버린다.
눈에 딱 보이는 정류장에 갔더니 버스는 막 지나났다.
다음 버스는 대략 40분 후
잘 됐다 싶어서 길을 다시 건너 40년 전통이라는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고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왔지만
길치도 촉이라는 게 있어서 묘하게 여긴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주위를 돌아와도 반대쪽으로 향할 것 같은 버스정류장은 안 보였는데..
몇 번을 돌아본 후에야 정확히 맞은편에 또 다른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바로 못 찾은 이유는
처음 본 정류장은 정말 그 한적한 바닷가에 있을 것 같은 정류장이었는데,
맞은편은 스마트 쉼터!!
라고 하얀색에 문도 있고 노래도 나오고 버스 노선 검색용 피씨도 있었다.
인지의 부조화 같은 느낌..
하지만 그 정류장이 맞는지도 의문이었고
이쪽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저쪽 버스를 놓치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고
그러다가 결국
길치를 인정하고 택시를 타겠지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순간에
처음 서 있던 정류장에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스마트 쉼터에서 기다리자.
이 와중에 틀어진 노래는 또 왜 이리 슬프지만 좋은 거지.
그거 아나 모르겠다.
자랑해도 되나 모르겠다.
나는 사실 길치가 아니었다!!
스마트 쉼터가 맞는 버스정류장 이었다!!!
진심 내가 [자랑스럽다]
나를 인정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실수는 모른척 넘어가주고
행운도 실력인냥 자랑해주는 것이
나를 인정해주는 방법.
진짜 별것 아닌 것에도 자랑할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내게,
내게 남은 시간은 대략 6시간..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자랑스럽다_남에게 드러내어 뽐낼 만한 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