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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털 빼고 보기

어스름한 새벽녘 

눈이 살포시 떠졌다. 


어제 아이가 한 말이 머릿속에 빙빙 맴돌았다. 

엄마, 왜 할 일을 매일 해야 해? 며칠 여행 올 때는 할 일 안 하는 때도 있잖아?


야! 며칠 여행 오는 게 아니라 너는 방학 내내 제주 살기를 했는데 그럼 방학 내내 할 일을 안 하는 게 말이 되니? 며칠 여행과 제주살이는 정말 다르지! 제주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보면서 너희가 좋아하는 것도 체험해보는 것이라서 제주살이라고 하는 거지 한 달 내내 여행 오듯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다다다닥!! 논리적인 이유를 수백만 게 대면서 더 이상 토 달지 못할 이유를 차고 넘치게 알려줬다. 

사실, 이번 제주 살기를 하는 동안 아이랑 매일매일 찌그락 짜그락 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클라리넷 레슨 수업이었다. 방학 동안 오케스트라 캠프가 있는 데 아이는 제주 살기를 오느라 참여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새롭게 악기를 클라리넷으로 바꾼 덕분에 아직 소리도 제대로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올해 말엔 오케스트라 연주도 있다. 근데 지금 아들 실력(? 실력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으로는 연주는커녕 참여 자체가 불가능 한 상황이라 마음이 쓰였다. 


또 아들 성향상 자신이 잘 못한다고 생각하면 더 위축되고 하기 싫어하는 걸 알기에 초반에 좀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제주에서 줌으로라도 클라리넷 레슨을 하기로 약속하고 제주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에서 30분 정도 매일 연습하는 일이 아들과의 가장 큰 전쟁이자 레슨 수업 전에 서로 가장 마음 상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결국 하루에 한 번은 아들을 닦달하는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제주에 왔으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여행지를 찾고, 코스를 짜고, 어쩌면 가장 기쁘고 재미있는 경험과 체험을 찾아주고 싶어서 왔는데 이놈의 클라리넷 연습이 늘 발목을 잡았다. 아침 30분 그냥 열심히만 해도 끝날 일을 하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 그것도 짜증과 화를 내면서 하는 모습에 참았던 화가 화르르 불타오른다. 


저녁에는 아무래도 시끄러워서 악기 연습을 할 수없으니 아침에 하고 나가자고 하는 데 30분이면 끝날 일이 화를 내고 감정을 다스렸다가 또 혼났다가 하느라 2~3시간이 지나간 날도 허다했다. 


꾸역꾸역 방학 내내 끌고 오다시피 했다. 아이의 자율성을 기다려주기에 제주 일정은 늘 촉박했고, 레슨시간도 매주 돌아왔다. 아이의 몫이라는 걸 알고, 아이가 원할 때 해야 하는 걸 알지만 맘처럼 뜻처럼 되지 않았다. 미베타의(내가 참여하고 있는 육아모임) 정신에도 위배돼서 카톡방에 참여도 못했다. 아이를 닦달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방학이 어느새 끝나기 하루 전, 오늘도 클라리넷 연습에 아이에게 마음이 상했다. 아빠의 휴가라 함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왔다.  짜증스럽게 연습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지만 꾸역꾸역 달래면서 참고 도와주고, 나왔더니 리조트 내의 레포츠 시설이 끝나버렸다. 비가 와서 야외에서 할 액티비티가 없어서 실내 액티비티를 참여하려고 했는 데 생각보다 훨씬 일찍 끝나버린 것이다. 


아이도 나도 온 가족이 약간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아이에게 짜증이 몰아쳤다. 오전부터 하자고 한 일을 오후 그것도 늦은 시간까지 잡고 있더니 결국은 아무것도 못하게 한 것이 아이인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결국은 한마디를 했다. 


아들, 봐봐, 이게 뭐야? 스스로 할 일을 좀 더 일찍 끝냈으면 온 가족이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게 된 거잖아. 액티비티 참여하지 못한 것이 아이의 책임인 양 비난을 쏟아냈다. 


다행히도 1절만 했다. 그래도 내 마음엔 앙금이 남아있었다. 제주살이 내내 그러던 일이, 결국 아빠랑 휴가에도 똑같이 나타났다. 행동의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니 더 짜증이 났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아이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면서 문득, 놀게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 환경에서 매일 무언가 하기 싫은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공부를 시킨 것도 아니었기에 욕심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지나 보니 악기나 운동은 어릴 때 배운 것을 성인이 되어서 같은 수준으로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좀 더 쉬운 길을 가게 해주고 싶었던 사심이 있었다. 


그간, 아이가 못한 것만 보이고, 짜증 내는 모습만 보였는 데 새벽녘에 아이가 얼마나 애쓰고 하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찡해졌다. 홀가분하게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을 담아 어제 그렇게 살포시 엄마에게 제안 아닌 제안을 에둘러 표현한 것인데, 공감이라곤 1도 없는 철벽 엄마만 있었다. 


새벽에 가만히 누어서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결국 연습도 아이의 몫이고, 준비하지 못한 채 레슨 수업을 받는 것도 아이의 몫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간 읽었던 육아서가 주마등처럼 지나가지만 이론으론 알아도 늘 실천은 별개다. 


여전히 마음에 사심은 남아있지만, 오늘은 아이를 대할 때 미운털을 좀 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춘기 엄마들이 보기엔 세상 귀여울 때고, 아직은 엄마 말을 듣는 게 어디냐고 하시겠지? 

엄마의 조급함으로 한 달 내내 애썼을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고 미안하다. 


얼마 전 읽었던, 놓아주는 엄마, 주도하는 아이라는 책에 나온 주문을 외워본다. 

숙제로 싸우기엔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한단다. 

다사다난했던 방학이 이젠 거의 끝나가는구나...  안녕!!!


오늘의 엄마 미션!! 
미운털 빼고 아들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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