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할머니의 아들, 그러니까 아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저에겐 할머니였지만 아빠에겐 엄마였잖아요. 사실, 그게 잘 상상은 안 갔거든요.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저에겐 처음부터 할머니였으니까. 누군가에겐 아내였고, 엄마였던 할머니가 잘 그려지진 않았어요. 그게 할아버지와 아빠의 당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지금까지 아빠에게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만, 그중에서도 꽤 많이 충격을 받았던 말이 하나 있어요. 대학교를 다닐 때, 한참 언론사에 입사하겠다고 공부하던 때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의 일이네요.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마침 퇴근시간이랑 맞물려 아빠에게 갔거든요. 편하게 집에 가려고. 아빠 차 좀 얻어 타고 가려고. 평소엔 잘 그러지도 않는데 말이죠.
“나는 내가 진심으로 효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자유로를 타고 가면서 아빠가 말했어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죠. 저는 아빠와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무척 잘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진심으로. 매우 풍요로운 집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아들, 딸이라고요. 내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진심으로 효도하는 게 아니라니.
“그렇게 하라고 배웠으니까, 교과서에서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하는 거 같아.” 아빠의 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찬찬히 생각해봤어요. 아빠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무엇이든 책임감이 큰 사람이잖아요, 아빠는. 아빠와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의 시간을 내가 다 알지 못하니까. 아빠의 마음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 책임감만으로도 아빠는 해야 하는 일을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충분히 잘하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해했어요.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나는 할머니를 좋아서, 잘하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아빠의 말이 조금 서운하기도 했나 봐요. 아니, 내가 나중에 아빠와 엄마를 지금의 아빠 같은 마음으로 대하면 어쩌시려고,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할머니는, 제게 싫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잖아요. 잘해주시려고만 했었고 누구보다 예뻐해 주시고, 좋은 기억만 있으니까. 내가 할머니와 투닥거리는 시간을 보낼 이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내겐 좋기만 한 사람, 좋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렇지만 아빠는 다를 수도 있겠구나 했어요. 엄마잖아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만 무조건적으로 예뻐만 할 수 없는 사이. 그래서 고맙기도 하지만 그래서 미울 수도 있는 사이. 아무 이유 없이 좋을 수만은 없는, 그게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정말 가까운 나의 가족. 그래서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이해했어요.
그리고 할머니와 만났던 지난 주말엔, 아빠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혼자 점심을 해결해야 하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아침부터 집에 오라고 그렇게 연락을 하는 거 있죠. 참 귀찮은 아빠예요. 그런데 점심을 다 먹고 나선 아빠가 한 마디 하시더라고요. 할머니를 보러 간다 하니까 말이에요. 할머니가 아프고 나서 후회되는 게 두 가지가 있다면서요.
하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미리 좀 들어둘 걸 그랬대요. 할아버지한테든 아빠들한테든, 우리 가족에게든 분명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우리 할머니 걱정이 많은 분이시잖아요. 할머니가 이렇게 갑자기 말씀을 못하게 될 줄 몰라서, 그걸 미처 듣지 못해서 그게 아쉽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할머니를 너무 몰라서 후회가 된대요. 아픈 할머니를 바라보며 할머니의 일생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대요. 아. 내가 우리 엄마를 정말 몰랐구나라고 후회가 되었대요.
정수기 앞에서 물 한 잔 마시며 내뱉는 아빠의 말이, 울컥하며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었어요. 예전 아빠의 말이 떠올라서요. 아빠는 진심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고요.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구나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