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농담처럼 해준 말인데 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거예요.”
“무슨 말인데요?”
“결혼해서 남편 마음 변할 걸 걱정할 게 아니라, 제 마음이 바뀌면 어떡하냐구요. 그럼 미련없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남편의 사랑마저 감지덕지 해온 여자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끊이지 않는 외도로 집밖을 떠도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로 인해 언제나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엄마를 보고 자라온 여자로서는 언젠가 남편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결혼을 멈추고 싶다면? 오직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사랑이 식어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은 경제력이 문제겠네요.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경제력을 가진 건 남자들이 다수였고, 그 경제력에 기대어 살았던 여자들은 선택지가 좁을 수밖에 없잖아요. 게다가 또 다른 사랑을 찾아야 한다면 외모 또한 출중해야 할텐데... 그것도 쉬운 일도 아니고.”
여자는 그 순간 당연하게도 엄마가 떠올랐다. ‘능력’이 있었다면 애저녁에 혼자 살았을 거라며 여전히 애달파하는 칠순의 엄마가.
문득 며칠 전 남편과 나눴던 대화가 기억났다.
“남자 연예인들은 열 살 넘게 차이나는 결혼을 잘만 하잖아. 여자도 못할 게 뭐야?”
“다음생에는 연예인으로 태어나고 싶다더니, 열 살 어린 여자랑 결혼이라고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여자는 남편의 평소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대화 내용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게 아니라 요즘 워낙 다들 결혼을 안 한다니까 말이야.”
“그건... 아마... 내 생각에는 남자는 욕구가 중요하고 여자는 사랑이 중요해서가 아닐까? 욕구니 사랑이니 둘 중에 뭐가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는 것 보다 남, 여가 추구 하는 게 다른 것 같아. 나는 잘 모르지만,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니까 열 살이든 스무살이든 어리고 매력적이기만 하면 상관없지. 트로피 같기도 하고. 상대방 마음이야 뭐... 누가 뭐래도 사랑이든 욕구든 외형적 매력이 중요한 거니깐. 그런데 여자들은 아는 거지. 매력이 철철 넘치지 않고서는 열살 어린 남자가, 스무살 어린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아, 그런데 얘기 하다보니까, 이건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가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여자도 능력 있고 돈 많으면 충분히 외모 따지고, 나이 따질 수 있다니까. 아직 사회적으로 여자들은 상향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니깐 그런 외적인 조건보다 경제적인 능력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지.”
“그런가봐. 남, 여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은 결국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기도 해. 혹은 내가 가진 걸 더 강화 시키는 쪽이거나. 여자가 원한다는 사랑도 결국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한 수단인 거네. 상대가 가진 걸 내가 원한다면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전제가 필요한 거야.
그래, 결국 여자는 아직은 외모가 제일 중요한 거였어. 젊고 이뻐야 되는 거야. 이참에 얼굴을 확 갈아엎어 버릴까?”
산책길에 농담처럼 나눴던 남편과의 그 대화에서 남편은 결국 사람들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결혼하면 좋을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자 역시 그 생각에 어느정도 동의하지만, 살다보니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것이 각자의 인생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따지지 않는 것보다 솔직해지기라도 하면 어떨까. 결혼을 통해 이득을 얻고 싶다고. 남는 장사를 하고 싶다고 말이다. 잠시 여자가 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앞에 앉아 있는 **씨의 입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여자는 테이블 아래로 힐긋 손목 시계를 쳐다보았다.
“저는 한 푼도 모아 놓은 돈은 없지만 다행히도 말이예요. 부모님이 도움은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요. 오빠가 자기도 그 정도 능력은 된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만약 부모님이 도와주신다고 해도 그게 어디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당신 아들 주시는 거지.“
여자도 비슷했었다. 결혼 전에는 돈이 없어도 다른 여자들처럼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고 특별히 돈을 열심히 모아야 한다거나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금 격차가 있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차이도 아니고 동년배의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 아닐까. 그러니 결혼을 한다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라고 생각 한건 결국 누군가에게 의지 하겠다는 마음이였던 것이다. 나의 부모님이든, 남자친구든, 남자친구의 부모님이든. 한 살 차이나는 오빠의 능력역시 그 부모님의 지원으로 이뤄진 것일 확률이 높았다. 그 긴 학벌을 만들어가기 위해 들어간 건 결국 부모님 돈이었을 테니까.
결혼하면 결국 여자가 약자가 되고, 여자들의 선택지가 좁아지는 건 결국 남편의 경제력에 의지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요? 결혼하니까 생각이 달라졌어요?”
“본인의 마음이 변하면 미련 없이 나오고 싶다면서요. 그러면 오빠가 뭐라든 절대 일을 놓지 말고, 자기 자신도 놓지 말아야죠. 그리고 집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둘이 비슷하게 합쳐서 시작해요. 그렇다면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남편을 미워하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효자 남자친구 때문인지 며느리 도리를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요. 어느 날은 어머님이 밥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저도 지금껏 우리 엄마가 해주는 밥만 먹고 살았는데... 집에 가는 길에 내가 너 밥해줄려고 지금껏 공부한 줄 아냐고 쏘아붙였더니, 어머니가 옛날 생각으로 그러시는 거지 자기는 그럴 일 없다고... 회사에서 밥 먹고 들어온다고 하데요. 그래도 걱정이예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주변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아실거예요. 결혼을 하면서 여자들의 삶이 한꺼번에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걸. 월급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내 삶이 단박에 달라지는데. 그분들이 평생 노력으로 이룬 부를 떼어 주시는데... 내가 손놓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건 힘들것 같은데...”
여자는 자신의 주변을 떠올리면서 밖에 일도 집안일도 하기 싫고, 시부모님 간섭도 싫고 결혼 후에도 내 삶을 지키고 싶다면서 왜 아무렇지 않게 남편의 경제력에 기대어 사는 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삶이 행복하지 않고, 다양한 갈등으로 얼룩져 있을 것이라는 것을 왜 예상하지 못하는 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라는 말로 자기 자신마저 설득하고 있는지 말이다. 삶은 끊임없이 내 것을 놓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는 전쟁터 같은 것일까. 게다가 내 것을 내놓지 않고, 정말 남의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 것 같아요. 당연한 며느리 도리라는 것도 없고 아내 도리도 정해진 건 없지만, 공짜도 없어요. 그걸 깨닫는 다면 그렇게 복잡한 문제는 아닐거라고 생각해요.”
결혼이라는 것을 부부가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좀 더 성숙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걸 생각하다면 많은 고민을 줄일 수 있는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예전에는 여자가 경제력을 갖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동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 을것이다. 결혼 역시 경제적인 이유로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평생 자신 하나를 먹여살리는 일조차 쉽지 않았을테니.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왜 똑같은 모습인걸까.
“다들 흔히 얘기 하잖아요. 아이가 없으면 부부가 결속력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서 꼭 경제력을 가져야 한다는 건 아니예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함께 헤쳐 나가는 동지 같은 존재거든요. 서로를 지지 하고 의지하면서. 남편은 제 삶의 버팀목이거든요. 하지만...”
하지만 여자는 결국 알게 되었다. 자신과 남편이 하나인 줄 알고 결혼 했지만,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도 없는 ‘두 사람’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 진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있고, 나를 압박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이 바로 제 목표예요. 그러면 세상사는 것이 조금 덜 겁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혼하고 나서 저는 이걸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사랑을 믿지 말라거나, 결혼하면 남편이 딴 말 할거다... 뭐 이런 게 아니라... 남편이 나를 아무리 사랑해도 누군가 내 삶을 온전히 책임져 줄 수는 없다는 거죠. 결혼 후에도 내 삶은 어김없이 이어지니깐 일상을 살아내는 건 부당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여자는 어두운 골목을 걸으며 자신이 저녁 내내 두서없이 내뱉은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씨는 똑똑하니깐 눈치 챘겠지. 내가 쏟아냈던 말들이 결국은 자신에 대한 질투였다는 걸 말이야...’
자기 자신마저 설득시키고 있는 건 어쩌면 여자 자신일지도 몰랐다.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삶의 무게에 버둥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 말이다. 여전히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매는 그 순간에도 부지런히 자신을 속이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