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즈월드, 바이버리 마을
나에게 여행은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겨지는, 유명한 장소와 맛집을 찾아다니는 여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라기보다 스스로를 계속 시험하게 되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의 연속이었다. 처음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던 날, 내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기억난다. 13살의 앳된 아이는 오스트리아로 간다고 했다. 그 때는 영국으로 가는 직항이 없기도 했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 이국의 공항에서 두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었던 나는 긴장으로 온 몸이 굳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옆자리의 아이는 내내 웃음을 잃지 않으며 마냥 즐거워 보였다. 부모님과 좌석이 떨어졌구나, 하고 생각한 나는 뒤에 오스트리아로 ‘혼자’간다는 아이의 말을 잘못 들었나 하고 몇 번이나 되물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간 기착지에서 내린 아이는 결국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다며 울음을 터뜨렸고, 아이의 표를 확인하자 비행기 시간도 빠듯한 상황 이었다. 결국 손을 맞잡은 우리는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없었어도 아이는 어떻게든 무사히 오스트리아에 도착했을 것이다.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아이가 나이에 비해 무척 의젓하고 영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와 손을 잡고 함께 달리고 싶었다. 오스트리아에 도착해서 맞이하게 될 낯선 상황들 속에서 누군가 잡아 준 손을 떠올리기 바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건조하고 서늘한 이국의 공기 속에서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흔들고 있던 그 손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경비를 아끼기 위해 맛있는 음식 대신 힘든 일정들을 소화하며 런던에서 버티고 있었다. 걸어다니느라 잠드는 것도 힘들정도로 다리가 아팠지만 나는 계속 걸었고, 사람들이 출근 하는 시간에 나도 함께 거리로 나가 10시쯤 해가 지면 그제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빠짐없이 돌고, 빡빡한 수업 일정들을 챙기고, 꽃과 정원에 관련된 정보라면 하나라도 더 모으기 위해 정신없이 헤매던 시간 이었다. 결코 열정이 넘쳐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마치 싸움이라도 하러 온 사람처럼 전투적이었고, 비장했다. 하지만 사실 그때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 시간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고 있다고 말 할 것만 같아 나는 강박적으로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나에게 느껴지던 낯선 열기와 과도한 죄책감이 뒤섞인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혼란스러웠고,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런 나에게도 휴식은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뒤늦게 동화책을 읽었는데, '곰돌이 푸'나 '피터 래빗'에 나오는 꿈같은 풍경은 나의마음에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 동화 속에 나오는 영국의 시골 풍경이 보고 싶었다. 그것은 나를 영국으로 이끌었던,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던 그 풍경 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은 번번히 나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겨주는 것이기도 했다. 동화속 풍경이 펼쳐진 코츠월드_Cotswolds에 가보고 싶었지만, 대중교통으로 닿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런던에서 코츠월드에 가는 것이 한국에서 영국으로 가는 것보다 휠씬 더 멀고 복잡한 것처럼 느껴졌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보고싶다는 열망과 낯선곳에 대한 두려움의 싸움 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목적지 보다 결심하는 순간과 거기까지의 여정이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목적지는 숨이차게 달려온 나에게 내미는 시원한 아이스아메라카노 한 잔 같은 것이다. 결국 얼음이 쨍그랑 거리던 시원한 그 잔을 내려 놓으면 나는 또 다른 곳을 향해 달려야 한다. 두려움이 많은 내가 자신감을 잃고 움츠러들면 나를 다독이는 것 역시 내 역할이었다. 겁먹지 말고 한 발만이라도 내밀어 보자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목적지를 향해 나를 조금씩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내가 여행을 떠나는 진짜 이유인지도 몰랐다.
코츠월드, 바이버리를 처음 찾아 갔을 때는 7월 이었다. 영국의 여름은 푸르고 아름답다.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으로 가서 ‘사이렌세스터’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사이렌세스터 교회 앞에서 바이버리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는 것이 표를 끊어주던 직원의 설명이었다. 버스가 차츰 런던을 벗어나자 한가로운 목초지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초록의 풀밭위에 하얀 점처럼 놓여 있는 양을 보자 영국의 양모 산업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피상적으로 갖고 있던 이미지는 언제나 현실을 만나면 처참하게 부서지게 마련이다. 런던에 있는 동안 여왕과 궁전에 대한 이야기 듣고 미술관과 박물관 사이를 누비면서 갖게 된 영국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소박한 시골의 모습에서 진짜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것이다.
‘양의 언덕’이라는 뜻이자 양의 품종명인 ‘코츠월드’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150㎞ 쯤 떨어진 곳이다. 정확한 지명이라기 보다는 양떼가 풀을 뜯는 목초지와 숲, 그리고 돌로 지은 중세의 오래된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구릉 지역의 여러 마을을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이다. 코츠월드 안에 있는 마을들은 평화로운 영국의 시골 분위기로 가득한 곳이다. 취향에 따라 이런 마을을 하나씩 찾아가는 게 코츠월드를 여행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버튼온더워터_Bourton-on-the-Water와 바이버리_Bibury가 가장 대표적 마을인데 나는 월리엄 모리스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한 바이버리에 마음이 끌렸다. 월리엄 모리스는 영국의 미술공예운동_Art and Creft Moment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앞서 살펴봤던 커트루드 재킬의 정원 디자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담쟁이넝쿨이 얹혀진 담장과 잔잔한 꽃들이 어우러진 벌꿀색집이 모여 있다니... 생각만 해도 동화 속 풍경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세이렌세스터 교회 앞에 내려 바이버리로 가는 미니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이대로 바이버리에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고 여행이 자꾸만 길어지는 상상을 나는 자주 했던 것 같다. 목적지는 여행의 ‘그 곳’ 이기도 하지만 그 곳에 닿으면 여행은 끝나버리고 마니깐.
너무나 예쁜 시골 마을인 바이버리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곳이지만, 번잡한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진짜 마을이었다. 작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창문 넘어로 아이와 엄마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리고, 천천히 걷다보면 돌담 안쪽 주방에서 접시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그 정감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작은 나무문을 '똑 똑' 문을 두드리고 싶었다. 내가 찾은 날은 마을이 유난히도 조용했는데,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자꾸만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걷게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정원에 물을 주던 할머니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작은 마을이라 마을전체를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바이버리 마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13세기에 벌꿀색 라임스톤으로로 지어진 알링턴 로_Arlington Row이다. 월리엄 모리스도 사랑했던 이곳은 수도원의 양모를 저장하는 코티지가 모여 있던 곳이었는데, 17세기에 방직공들에 의해서 가정집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시골집이 모여 있는 중세의 거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영국의 자연보호와 역사유적 보존을 위한 민간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가 1928년 건물들을 사들여서 지금껏 보존해 오고 있다. 알링턴 로는 영국 여권 안쪽 표지에 사진이 인쇄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콜린강에는 백년이 넘는 송어양식장도 있다.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그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바이버리의 경치를 바라 보았다. 물위에 백조마저 유유히 떠다니지 않았다면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풍경 같았다. 물소리, 바람소리가 없었다면 사진 속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지도 몰랐다. 바이버리를 한바퀴 휘리릭 돌고나면 의외로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무언가를 보기 위해 그곳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곳만의 분위기에 젖어들기 위해 찾는 곳도 있는 것이다. 요즘은 다들 SNS에 올릴만한, '인증사진' 찍기 좋은 곳을 많이 찾아다니는 것 같다. 과연 누구를 향한, 무엇을 향한 인증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뿐만아니라 멋진 사진 속 장소를 막상 찾아가보면 사진에 나올만한 뒷 배경만 존재하는 끊어진 풍경인 경우가 많다. 사진으로 그럴듯했던 모습이 실제로 보면 옹색하기 까지 하다. 인증사진을 찍고 부랴부랴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보다 나는 그저 거기에 있고 싶었다. 시간이 쌓여있고 사람들의 삶이 쌓여 있는 곳. 몇 백년의 시간이 흘러간 곳을 아직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의 삶이 그곳에서 흘러간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저 예쁘고,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풍경이라는 말에 혹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정성이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 무사히 도착한 내 자신이 기특했던 것이다.
내 마음속 풍경으로 자리잡았던 그 영상도 내셔널 트러스트_National Trust에 관한 것이었다. 건축물뿐만 아니라 현재 많은 정원도 내셔널 트러스트에 의해 관리,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시간에 따라 변화가 심한 식물의 특성상 정원을 원형의 모습으로 보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마 관리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많은 정원 유적지들도 복원해 관리 하고 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피터 래빗_The Tale of Peter Rabbit, 1902의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_Beatrix Potter가 레이크 디스트릭트_Lake District 의 땅을 사들여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부를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배아트릭스 포터는 초기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이 뿌리내리게 한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레이크 디스트릭스는 피터 래빗 동화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건축물이나 정원 뿐만 아니라 풍경까지도 보존 할 수 있는 그 열정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시골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나는 하염없이 백조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공간까지 아름답지 않다면 홀로 빛나기 어렵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가끔은 버스 시간표도 미리미리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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