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식물원 이야기
Royal Botanic Garden, Kew
Kew, Richmond, London, TW9 3AE
런던 사람들에게 날씨는 중요한 관심사 일 수밖에 없다. 어둡고 흐린 겨울을 통과해 봄과 여름을 만나면 잔디밭에 누워 따뜻한 햇살을 마음껏 쬐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늘은 해사한 얼굴을 하고도 갑자기 비를 뿌려대기 일쑤여서 ‘날씨 눈치보기’는 여름에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마치 맑은 날씨를 확답이라도 받은 듯 큐가든_Kew Garden으로 향했다. 큐가든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식물원이다. 런던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것들이 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니 영국이 가진 가장 큰 매력 중에 하나는 바로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큐가든은 런던 남서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튜브_Tube' 또는 ’ 언더그라운드_Underground'라고 불리는 지하철을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3존 _ Zone 3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중심가를 헤매고 다닌 나의 발걸음도 이제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게 된 것이다.
큐가든을 수식하는 말은 너무나 많다. 1759년에 세워진 큐가든에는 3만여 개의 식물 채집본을 보유하고, 7만여 그루가 넘는 식물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700여 명의 정원사와 식물학자가 함께 하고 있으며,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과 조각상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고 식물원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온실인 팜 하우스_Palm House에는 희귀한 식물로 가득하다고 하니 나는 내딛는 발걸음이 엉길 만큼 마음이 바빠졌다. 하지만 지도를 펼친 내 손은 이내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그 막막함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드넓은 식물원을 앞에 두고 나는 어디를 먼저 가야 할지 망설이다가 과연 다 둘러볼 수 있기나 한 건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무엇부터 봐야 할지 고민하다가, 내 머리의 한계를 느끼고 그만 좌절하고 만 것이다. 이런 기분을 나는 이미 대영박물관_The British Museum에서도 느꼈고, 내셔널 갤러리_The National Gallery에도 느꼈다. 영국은 시간만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 쌓여온 ‘방대함’도 가지고 있었다.
이럴 때 내가 찾은 방법은 기념품숍에 가는 것이다. 예쁜 기념품에 마음이 빼앗기기도 하지만, 기념품만 하나 사고 갈까 하는 마음이 이내 하나라도 보고 가자는 마음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기념품숍에서 구입한 가이드 북에는 큐가든에서 경험해야 할 것들을 항목별로 몇 가지 정리해 놓고 있었다. 온실, 이국적 식물들, 옛 궁전의 흔적, 다양한 종류의 정원, 나무들, 수중 생태계와 새, 예술작품 그리고 그 큐가든에서만 볼 수 있는 그 계절의 풍경까지.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넘기다 보니 마음이 좀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공부하듯 식물을 들여다보기보다 한가로이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표정의 사람들이 보였다. 지식을 쌓으려고 하기보다 경험하기로 하자고 했던 나 자신과의 약속을 다시 되새기게 되는 순간이었다.
큐가든은 앞서 얘기한 식물추적자들, 즉 전 세계로 식물을 수집하러 떠났던 수집가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물종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각지의 다양한 기후대의 식물들이 살아가기 위해 온실_Glass Palace 은 매우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팜 하우스_Palm House는 큐가든의 상징 같은 곳이다. 멀리서 그 형체를 보면서 왜 궁전_Palace라는 단어를 쓰는지 절로 이해하게 되었다.
웅장한 규모의 온실 내부는 몇 구역으로 나눠져 이국에서 온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내 방에서 이파리 두 개를 팔랑이던 고무나무도 그곳에서는 무수히 많은 잎을 달고 천정을 향해 뻗어 있었다. 내가 매일 줄기가 잘린 채로 만나게 되는 꽃과 잎들, 작은 화분에 갇혀 옹색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식물들도 온실에서는 마치 제 땅에 뿌리를 내린 듯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온실은 총 네 개가 있는데, 다양한 식충식물을 볼 수 있는 곳도 있고, 화려하고 이국적인 난을 구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실내에서 많이 키우는 열대 우림기후의 식물들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커피, 초콜릿, 코코넛, 후추, 고무 같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식물들도 잘 정리되어 있다. 둘러보다 보면 식물이 우리 일상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식물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있지만, 누군가는 목재로, 또 누군가는 약으로, 또 누군가는 먹거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식물은 이렇게나 다양한 것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열대우림 기후를 잘 재현해 놓은 온실을 나서자, 아름드리 나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물원이나 수목원이라는 느낌보다는 너른 공원 같은 곳에 다양한 나무가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나무를 봐도 좋지만 그저 걷거나 뛰어놀아기만 해도 좋은 곳이다. 하지만 허리를 뒤로 젖혀 올려다 보아도 그 끝은 보기 힘든 나무들이 즐비한 곳에는 트리톱 워크웨이_Treetop Walkway라는 것이 있다. 올라가 보면 높게만 보이던 나무 꼭대기를 내 눈높이에서 둘러볼 수 있다. 나무의 구조나 뿌리를 알 수 있는 구조물도 배치되어 있어 마냥 뛰어노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학습장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나 역시 트리톱 워크웨이에 올라가 나무 사이를 누비며 밤송이가 손에 닿자 나무 위에 올라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밤송이를 들여다 보기도 하고, 저 멀리 경치도 감상하며 즐거워 하고 있자니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큐가든에서는 큐 궁전_Kew Palace를 비롯해 왕가의 가족이 머물렀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스타일의 퀸즈 가든_Queen's Garden은 지금은 ‘향기 정원’의 역할이지만 그 시절에는 ‘약용’이었을 허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300년 전의 정원을 완벽하게 복원했다고 하니 궁전 뒤쪽의 정원도 꼭 찾아보아야 한다. 복장마저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한 큐 궁전의 정원도 아름답지만 5월 ‘블루벨’ 꽃으로 뒤덮인 샬롯 여왕의 오두막_Queen Charlotte's Cottage역시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큐가든이 이미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지만 그 안에서 특색 있는 정원들도 만날 수 있다. 일본식 정원이나 분재 정원처럼 지역적 특색을 지닌 곳도 있고, 장미 정원이나 목련 정원, 철쭉 정원처럼 특정한 꽃의 여러 품종을 보아 놓은 곳도 있다. 뿐만 아니라 겨울이 되면 아름다운 수피나 열매가 드러나는 나무들을 모아 놓은 ‘겨울 정원’도 있다. 식물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분위기를 한곳에서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인 것이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연못_Pond에서는 수생 식물이나 철새들을 볼 수 있는데, 여러 생물종이 어울려 살아가는 생태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식물 세밀화_Botanical Art와 그림 등 예술작품이 전시된 갤러리도 있다고 한다. 큐가든을 적당히 둘러봤는데 아직 해가 남아 있다면 그냥 걷는 것도 좋다. 자연만큼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을 다양하게 바꾸는 것도 없을 것이다. 나는 봄이면 작고 여린 새잎을 보고 기뻐하고 여름에는 꽃을 반긴다. 가을에는 단풍과 저마다의 모양으로 생긴 열매를 만져보고, 겨울에는 아름다운 수피와 빈 가지를 흔드는 바람을 바라본다. 영국은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아 날씨가 많이 춥지 않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즐기는 나에게는 여름 못지않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계절의 분위기까지 느꼈다면 이제 미련 없이 돌아오면 된다. 나는 그렇게 나를 다독였다. 행여 미처 보지 못한 어떤 것이 남았을까 마음 졸이는 나에게... 본전(?) 생각에 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못하는 나에게 말이다. 자연에서 배운 지혜는 다름아닌 수용과 비움이기 떄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큐가든의 연회원권을 구매해 자주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고 또 한 번에 다 둘러보기도 벅찬 곳이기에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의 식물원 조성에도 거의 표준이 된 세계 최고의 식물원. 나도 이 정도는 어디서 주워듣고 호기롭게 발을 디뎠는데, 내가 가진 얕은 지식은 언제나 그 ‘실체’ 앞에 서면 마른 나뭇잎만큼이나 힘없이 바스러져 버리고 만다. 그 끝이 짐작조차 되지 않은 넓은 땅, 몇 백 년은 가뿐히 넘겼을 아름드리 고목 아래 서 있자니 그저 발길 닿는 데로 걸어보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분위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자극이 되고 위안이 되는 공간이 있는 것이다. 큐가든은 세계 최대의 연구기관이자 교육기관이지만, 나에게는 무작정 걷고 싶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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