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드파크. 그린파크. 세인트제임스파크 그리고 리젠트파크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고 말았다. 별거 아닌 일상들이 소중한 추억이 되어 버렸고,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들기 시작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나누던 시간과 공간들은 불안감으로 채워지고, 스치는 손길에도 멈칫하던 순간, 나는 ‘꽃’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언제 처음 꽃을 꺾어 탁자 위에 올려 두었을까?
매일 걷던 길가에도, 탐스럽게 익은 과일나무에도 꽃은 피어 있다. 그 아름다움을, 그 생생한 자연을 나의 집안에서도 보고 싶은 마음이 아마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나의 공간'이 중요해진 시대, 나는 문득 ‘꽃’을 배워보기를 권하고 싶다. 꽃을 배우는 것은 내가 잠자고, 일상을 누리는 나의 공간에 자연을 들여놓는 방법이 될테니깐. 이제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지나오면서 언제나 당연한 듯 누리던 모두의 공간을 언제다시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배웠다. 산책길에 마주친 이름 모를 들꽃의 아름다움마저 간절해진 다는 것도 말이다.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한 조각의 초록이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 알아야 할 때인 것이다.
런던을 걸으면 언제나 내 발걸음에 초록색이 묻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런던에는 큰 공원뿐만 아니라 작고 아담한 공원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뿐만 아니라 까치발을 하고 들여다보게 되는 누군가의 정원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대략 삼천 곳이 넘는 공원이 런던에 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도심을 가로지르는 하이드파크_Hyde Park와 세인트 제임스 파크_St. James' Park 그리고 그린파크_Green Park를 걷다 보면 런더너_Londoner들의 일상이 공원 안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공원을 가로질러 출, 퇴근을 하기도 하지만 여행자들 역시 이 공원을 가로질러 목적지로 가는 경우가 많다. 잔디밭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기도 하고, 잔디밭에 모로 누워 책을 읽는 사람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또 공원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운동을 하고 있는 무리와도 마주칠 수 있다. 18세기 풍경식 정원의 영향을 받은 공원은 마치 지금 자신이 도심 속 공원에 들어와 있는지 시골의 한가로운 목초지를 걷고 있는지 헷갈리게 만들기도 한다.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산책로와 잔디밭뿐만 아니라 정성스럽게 가꿔 놓은,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정원도 구경할 수 있다.
정원박물관에서 나와 템즈강_Thames River을 왼쪽에 두고 걷다 보면 곧 웨스트민스터 궁전_Palace of Westminster 으로 불리는 국회의사당과 빅벤_Big Ben이 보인다.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웨스터민스터 브릿지_Westminster Bridge를 건너 계속 걷다 보면 어느덧 내 발걸음은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 도착한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는 이어진 그린파크와 함께 버킹엄 궁전_Buckingham Palace을 감싸고 있다.
버스나 튜브를 타기 보다 주로 걷는 것을 즐겼던 나는 웨스트민스터를 시작으로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지나면 트라팔가 광장_Trafalgar Square이나 피카딜리 서커스_Piccadilly Circus 또는 옥스퍼드 서커스_Oxford Circus로 갈 수 있으니 굳이 시간을 내서 공원을 찾지 않더라도 매일매일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는 야생조류보호구역인 덕 아일랜드_Duck Island에 사는 펠리컨이 유명하다. 백조를 비롯해 다양한 새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공원이다. 새를 무서워해서 가까이 가기는 쉽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한가로운 풍경을 앞에 두고 한 숨 돌리기 좋은 곳이었다. 특히 공원 내에 블루브릿지_Blue Bridge에 서면 저 멀리 런던아이_London Eye가 보이는 데 그 모습이 아주 아름답다.
그린파크는 그 이름에 걸맞게 온통 초록으로 꽉 채워져 있는 공원이다. 아름드리나무와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어 잔디에 누워 광합성을 즐기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을 구경했다면 복적이는 인파에서 빠져나와 그린파크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을 것이다. 나도 가던 길을 멈추고 사람들을 따라 선배드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보통 평일 한낮의 공원은 한산할 것 같지만 런던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 틈 속에서 적당한 자리를 잡기 위해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만 이러고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바쁜 일상을 등지고 온 나에게 공원에서의 게으름은 왠지 모를 불안함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와 그린파크가 버킹엄 궁전의 정원이었다면, 하이드파크는 왕실의 사냥터였다. 헨리 8세가 사슴을 사냥하던 곳이었는데 1637년 대중에게 공개된 정원이다. 산업혁명으로 도시로 몰려온 노동자들의 척박한 생활환경을 고려해 왕실 정원은 점차 대중에게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었다. 도시근로자가 된 사람들은 일요일이 되면 휴식과 오락을 즐길만한 장소가 필요했고, 바로 그곳에서 자연을 경험하고 더불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이드파크는 그린파크에서 길하나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두 공원에 비해 엄청나게 넓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날, 공원을 걷고 있던 내 귀에 다그닥 다그닥 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탄 제복 차림의 한 무리가 지나가고 있었고, 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 속에서 나는 점점 공원의 모습이 아득해져 가는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넓은 공원을 한 번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았다. 그 뒤로는 하이드파크 내 장미 정원을 둘러보거나 바로 이웃해있는 켄싱턴 가든 _Kensington Gardens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원 서쪽 랭커스터 게이트_Lancaster Gate를 통해 하이드파크에 들어가면 되는데 분수가 멋진 이탈리안 공원을 바로 만날 수 있다. 오후가 되면 특히 사람들이 많이 찾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그 옆으로 켄싱턴 궁_Kensington Palace과 켄싱턴 가든이 위치해 있다. 뿐만 아니라 공원 남쪽에 인접한 자연사 박물관_Natural History Museum이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_V&A,Victoria and Albert Museum을 보고 공원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드넓은 하이드파크 전체를 둘러본다는 것은 웬만한 고민거리가 있지 않고서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거리가 생기면 무작정 걷는 나에게도 말이다.
켄싱턴 궁전은 고 다이애나 비가 생전에 살았던 곳으로, 현재는 그의 아들 윌리엄 부부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 뒤로 넓게 펼쳐진 공원에는 유명한 피터팬 동상이 있는데, 작가 제임스 배리는 켄싱턴 가든에서 소설을 구상하던 중 우연히 만난 데이비스 부인과 그의 네 아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소설 [피터팬]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켄싱턴 궁전 앞에는 꽃이 가득한, 들어가 보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숨겨진 정원도 있다. 내가 진짜 보고 싶었던 것이 그 정원이었다. 어디를 가든 내가 열정을 갖고 찾아 헤매는 대상이 있다는 건 무척 행복한 일이 아닐까. 그것을 갖지 못해 애태우기도 하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아침마다 피곤한 몸을 다시 일으키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되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욕심스럽게 공원 세 군데를 돌아보고 대자로 뻗어버린 날 나는 꿈에서도 공원을 걸었다. 내 열정이 머무를 곳이 있었던 그때가 지금은 무척 그립다.
랭커스터 게이트에서 나와 공원을 오른쪽에 두고 걷다 보면, 하이드파크의 모서리쯤에 마블 아치_Marble Arch가 있다. 거기서 조금만 더 그대로 걸으면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샐프리지 백화점’이 나온다. 백화점을 오른쪽에 놓고 발걸음을 옮기면 ‘셜록홈즈’로 유명한 베이커 스트리트_Baker Street를 만나 게 된다. 나 역시 영국 드라마 ‘셜록_Sherlock’을 즐겨 봤는데,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고 나서부터 이 일대에서 ‘셜록 투어’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하이드파크의 ‘피터팬’ 동상 앞에서도 느꼈지만 이야기의 힘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베이커 스트리트가 가까워지면 이제 다음 목적지 리젠트 파크_Regent’s Park도 얼마 남지 않았다.
런던 도심에 있는 가장 큰 왕실 정원으로, 리젠트 파크 역시 왕실의 옛 사냥터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넓은 부지와 함께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한적함이 느껴졌다. 관광지가 밀집되어 있는 앞의 세 공원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있어서 인지 공원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물론 그것은 엄청난 공간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호화로운 테라스 하우스들이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게 만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디를 가든 부유한 주택단지는 강과 공원을 따라 늘어서 있으니 런던이라고 예외 일수 없다. 박물관, 미술관도 부족해 궁전과 이웃할 뿐만 아니라 아니라 광활한 녹지와 템즈강을 내 집 앞마당처럼 두고 살 수 있으니 진정한 부자는 런던에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곳을 부지런히 오가며 풍경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눈에 담으려고 애썼던 이유도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애틋함이 아니었을까.
리젠트 파크를 자주 찾았던 이유는 바로 메리 여왕의 장미정원_Queen Mary's rose garden을 보기 위해서였다. 공원 남쪽에 동그랗게 위치한 퀸 메리 로즈가든은 영국을 대표하는 400여 종의 장미가 모여있는 곳이다. 그 수가 3만 송이에 달한다고 하니 장미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영국장미협회 후원자였던 메리 여왕은 장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는데, 이 장미정원은 그런 메리 여왕의 엄격한 관리 아래 만들어졌다고 한다.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자면 꽃구경만큼 어려운 구경이 또 있을까 하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다. 꽃이 가장 예쁘게 핀 순간을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겠지만, 그 시기를 맞춰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며칠 동안 잊고 있었던 장미를 떠올릴 때면 꽃은 여전히 입을 꼭꼭 다문 봉우리 이거나, 이미 절정의 순간이 지나고 꽃잎을 떨궈낸 앙상한 자리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방법은 하나, 계속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꽃이 필 시기가 되면 부지런히 공원을 드나들며 아름답게 피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렇게 하면 봉우리가 열리고 여린 꽃잎이 한 장 한 장 부드러운 입술처럼 살짝 뒤로 말리는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이 장미 정원의 절정기 이므로 그때 리젠트 파크를 방문한다면 장미의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장미’와 ‘꽃’이 같은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꽃일을 하면서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장미는 꽃의 다른 말이었다. 꽃 중에서 가장 유명한 꽃. 세상 모든 꽃이 다 아름답지만, 장미를 만나면 그 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장미’는 그 자체로 이미 사랑이라는 단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장미는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모습의 장미를 만들기 위해 꽃이 계속 육종 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향기를 잃는 장미도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꽃을 보면 먼저 코부터 가져간다. 장미는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그 향기도 제각각이다. 달콤하기도 하고 싱그럽기도 하다. 우리가 장미를 보고 진짜 감탄하는 순간은 장미의 향기까지 맡고 난 후 일지도 모른다. 메리 여왕의 장미정원은 떠도는 공기마저 아름답다.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오후, 푸른 하늘 아래 놓인 선베드에 누워 잠깐 낮잠을 즐기는 것도 좋다. 설핏 든 잠 속에서 장미향이 가득 실린 공기를 붙잡고 있자면 꿈마저도 향기로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곳에는 장미꽃을 구경하는 사람도 많지만 여느 공원처럼 조깅을 하거나, 책을 읽고 잠깐 낮잠을 즐기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수다를 떨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달콤한 향기를 배경으로 흘러가는 런던의 일상. 꽃은 실상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일상을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만은 확실하다. 장미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이름을 외워 보는 것도 좋지만 그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공원의 일상의 경험하고 꽃의 아름다움에 몸을 던져 보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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