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비타 색빌웨스트의 정원
정원을 찾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 이유가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저마다의 계절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 작업에 아이디어를 얻거나, 새로운 식물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첫 번째다. 여기서 ‘발견’이라는 것은 새로운 품종의 꽃을 보게 되는 즐거움도 있지만, 언제나 익숙하게 봐왔던 꽃이 딱 맞은 제 자리를 찾아 전혀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때, 나는 ‘저 꽃이 저렇게 예뻤나’하고 감탄하게 된다. ‘가치의 재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정원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그것은 단순히 식물 하나하나가 전하는 개별적인 아름다움과 달리, 나무와 잎, 꽃, 하늘, 새소리 같은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분위기가 나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또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원을 만나면서 누군가의 이야기 혹은 누군가의 인생을 만나게 되는 경험 때문이다. 정원은 한 가지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가 매우 어렵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시간에 부응하기에 누군가의 손길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정원을 거닐다 보면 곳곳에 담겨 있는, 누군가가 쏟았을 시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 공간에 담겨있는 많은 이야기도 함께 말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이유를 모두 만족시켜 줄 정원을 찾아 나섰다. 언제가 ‘밤의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달이 환한 밤 하얗게 피어있는 꽃들이 달빛이 받아 더욱 반짝일 때, 정원을 거닐며 생각에 잠겨 있는 시인. 사진 속 정원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하얀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흰색의 꽃만을 심은 것은 밤에 정원에 나와 거닐며 생각에 잠기길 좋아하는 시인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밤에 꽃구경을 해보면 낮에 보았던 화려한 색감의 꽃과는 다르게 하얀색 꽃이 가장 빛나고 또 화려하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달빛을 받아 굵은소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메밀꽃'을 떠올려도 좋다.
런던을 벗어난 여행에 차츰 재미가 날 때쯤, 어느 맑은 날 아침 나는 채링크로스 역_Charing Cross Station으로 가서 당당하게 스태이플허스트_staplehurst를 외쳤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약해지지 않기 위해 괜히 씩씩한 척, 당당한 척이 늘어가고 있었다. 어설프게나마 문장으로 말을 하려고 노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두 단어’ 영어를 지나 '한 단어'영어로 버티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채링크로스역은 1873년에 발표된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소설[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영국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그의 하인 파스파르투가 도버 행 기차를 타면서 여정을 시작한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런던에서 이런 소소한 이야기거리를 발견하는 것을 좋아했다.
스테이플허스트는 예쁜 앤틱 숍과 집집마다 잘 가꿔진 정원이 있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영국은 런던을 벗어나면 어디를 가든 그냥 지나치기 아까울 만큼 예쁜 마을이 있었다. 그럴 때면 정신없이 달려가는 곳이 목적지가 아니라 지나치는 모든 곳이 다 목적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헤이스팅스 행 버스를 타고 시싱허스트 마을에 내리면 된다(라고 알고 있었다!). 자꾸만 발길을 붙잡은 풍경에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버스에 올라 시싱허스트 정원에 간다고 하니 버스기사 아줌마가 내려서 좀 많이 걸어야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일단 타라고 했다. 버스 안은 시골 버스답게 사람들이 모여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잡으려고 두리번거리자 뒤에 앉은 아줌마가 기차역에서 직통버스가 운행이 되는데 왜 그걸 타지 않았느냐고... 게다가 ‘무료’라고 했다. 우리네 엄마들만 딸들 걱정이 많은 게 아니었다. 그분은 더욱 ‘친절’하게도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쟤가 역에서 바로 탈 수 있는 무료 직통버스가 있는지도 모르고 '저러고' 있다'며 이야기를 해대는 통에 버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안타까워하는 사태 발생가 발생한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헤매면서 나는 왜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나 안타까워했는지 알게 되었다. 가까스로 발견한 표지판을 따라가봤지만 끝도 없는 사과밭이 나오더니 다음 표지판에서는 산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왔다는 생각에(그때 돌아 서야 했다!) 결국 산에 오른 나는 인적이 드문 산을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모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충 산을 하나 넘은 것이었다. 그것도 멀쩡한 대로변의 길을 두고서 말이다. 덕분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경험을 했지만, 영국의 산길을 오롯이 홀로 걷는 경험도 했다. 나의 여행은 지나치는 모든 길이 목적지이니까.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정원으로 매년 지정될 만큼 인기가 많은 시싱허스트 정원은 정원을 보호하기 위해 관람시간을 정해놓고 개방을 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도착했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킬 틈도 없이 나는 성 입구로 향해야했다.
시싱허스트 성과 그 정원_Sissinghurst Castle and Garden은 여류작가인 비타 색빌 웨스트_Vita Sackville West와 그의 남편인 헤롤드 니콜슨의 삶이 담겨 있는 곳이다. 둘 다 귀족 출신으로 상류사회의 일원이었기에 결혼 자체에도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결혼 이후의 그들의 톡특한 삶의 방식이 사람들에게는 이야깃거리였다고 한다. 그들은 레즈비언과 호모라는 묘한 관계 속에서, 항상 서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만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우정 같은 사랑을 지속한다. 특히 비타는 여러 번의 떠들썩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는 우리에게도 유명한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와의 스캔들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비타를 위한 소설 <Orlando>를 출간하기도 했다.
탑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멋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넓지 않은 정원에서 나는 미로속을 헤매듯 번번이 길을 잃었다. 관목들이 빽빽하게 뭉쳐 초록의 벽을 만들면 마치 방처럼 아득해진 공간이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각각 공간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방문을 열 때마다 새로운 공간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정원은 신비로웠고, 방향을 잃기 쉬웠다. 이런 독특한 공간 구성은 해롤드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역시 비타의 몫이었다.
정원에서 바라보는 중세의 탑은 아주 아름답다. 그 탑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평면도를 보듯이 정원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헤매던 곳이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주변 풍광과 함께 어우러진 정원의 모습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앞서 만났던 정원 디자이너 거트루드 재킬의 스타일을 따랐다고 하는 시싱허스트의 정원은 로빈 윌리암스가 주창했던 19세기 아트 앤드 크래프트 스타일의 정원으로 분류된다.
1930년 이 성에 처음 방문한 비타는 첫눈에 이곳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다양한 이국의 경관들을 체험했던 부부는 그 경험을 디자인의 원천으로 삼아 시싱허스트의 정원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갔다. 무엇보다 비타에게 시싱허스트는 아마도 외부세계로부터 단절된 자기만의 세계로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피난처였을지도 모른다. 낮에는 정원을 가꾸고, 밤에는 정원에 우뚝 솟아있는 타워의 방에서 글을 쓰며 소일했다고 하니 외롭고도 풍성했을 그녀의 삶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내가 사진에서 보았던 백색의 정원_White Garden은 온갖 하얀색의 꽃과 잎마저도 은빛이었다. 비타는 이곳에서 한 밤중에 산책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주목과 회양목이 둘러쳐진 공간에 5월에서 9월까지 하얀 꽃들이 연달아 피어난다. 건조하고 서늘한 밤,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꽃 사이를 거닐며 비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코끝을 스치는 향기와 바람에 그저 가만히 취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모기가 없지 않은가! 그 감성을 나도 느끼고 싶어 달밤 산책을 좋아하는 나도 꽃구경을 나선 적이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어둠 속에서 화려한 색감의 꽃은 잘 보이지 않고 대신 흐드러진 향기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달려드는 벌레떼와 모기에 계속 박수를 쳐야 한다. 시싱허스트의 화이트 정원은 철저하게 달밤을 위해 만들어진 정원인 것이다.
마음 한가득 담아온 아름다운 시싱허스트의 정원. Vita는 라틴어로 삶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시싱허스트에서 만나게 되는 건 아름다운 정원뿐만 아니라 파란만장한 비타의 삶이기도 한 것이다. 비타에게 정원은 삶이었고, 인생의 동반자와 소통하는 통로였다.
‘비타의 삶은 문학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성장했고, 정원으로 완성되었다.'
Sissinghurst, Biddenden Road, near Cranbrook, Kent TN17 2AB
그 수많은 여행에서 내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시싱허스트에서는 마음편히 셔틀버스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잠깐졸기도 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편안하고 느긋했던 순간들은 기억 속에서 빠르게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문학이 되고 정원에서 꽃을 피워내는 것은 대부분 고난과 아픔 그리고 상처인지도 모른다. 하물며 사랑까지도.
#영국여행 #영국시골여행 #영국정원여행
#런던여행 #런던 #영국
#시싱허스트 #비타색빌웨스트 #버지니아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