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책을 좋아해서 한글을 일찍 뗄 줄 알았지.
"어쩜 그렇게 책을 잘 읽어요?"
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게 언제까지 갈까 싶어서 칭찬이라기보단, 아직 내 아이가 책에 관심이 많구나 확인하는 정도로 들린다. 물론 엄마의 마음은 아이가 인생의 모든 순간에 책을 통한 기쁨을 누리는 사색하는 아이가 되길 바라지만, 자식 인생은 부모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이 친구 엄마들 중에는 아직 한글이 제대로 안되어서 고민이라고 말하는 엄마들의 한숨과 걱정에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서 그런지 종종
"00 이는 한글 일찍 뗐죠?"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도 일찍 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하하.." 이게 내 답의 최선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 3개월 전까지만 글자를 알면 되지 않을까 하는 여유로 아이의 한글 떼기가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터라, 아이의 빠르지 않은 한글 습득이 내겐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의외로 다둥이 엄마들 중 첫째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엄마들에게서 얻은 정보는 한글을 모르고 가면 1학년 때 아이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될 수도 있다는 거다. 한 반에 1~2명씩 한글을 못 떼고 온 아이들이 있는데, 남아서 공부를 시키면 다른 아이들에게 '모자란 애' 정도로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음, 그럴 수도 있구나.
책을 좋아하는 거랑 한글을 떼는 건 별개라는 걸 아이를 키우며 알았다. 교육 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아이의 뇌에서 글자를 그림처럼 인식해서 머리에 넣고 기억한다고 했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의 원리를 깨우친 아이들 (명석해라!)은 글자를 빨리 익힌다고도 했다.
글자를 그림처럼 머리에 담는다는데, 내 아이는 책을 보면 그림에 집중했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 원리라...
아, 그건 생각도 못한 과정인데. 옆에서 지켜본 결과, 원리를 터득하는 케이스에 내 아이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어린이집에서 만 4세에 처음 자기 이름을 좌우 대칭으로 뒤집어서 삐뚤빼뚤 적어서 온 날. 자기 이름을 정말 그림처럼 기억을 하긴 한 건데, 애썼네, 아 귀여워했다. 그때부터 반 친구들의 이름과 담임 선생님의 이름을 스케치북에 수없이 써주고 써줬다. 물론, 아이의 주문에 따라서.
아기 때는 경찰차, 소방차, 구급차를 수백 번도 넘에 그렸는데, 이젠 글자구나. 껄껄껄... 했다.
몇 개월동안 제 이름을 제대로 쓰는데 집중하더니, 그 후에는 '엄마'라는 글자를 열심히 썼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만 5세 초에도 아이의 한글은 크게 확장되지 않았다. 의외로 혼자 책을 읽는다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엄마가 읽어주는 상황이었다. 언젠가는 혼자 읽을 수도 있겠지.
만 5세가 되면서 원에서 열심히 한글 수업에 집중해 준 덕분에 아이는 한글 학습에 본격적으로 투입이 되었다. 집에서 해준 거라곤 물어보는 글자를 대답해 준 것과, 몇 년 전부터 붙여둔 한글 자음 모음 벽포스터를 아이가 더 잘 볼 수 있는 곳에 바꿔 붙여둔 것.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책 읽기.
만 5세 가을 학기가 시작될 즈음, 아이가 친구들과 서로 편지 쓰기를 시작했다. 매일 "00야, 내 집에 놀러 와."라고 써주는 초대왕 친구의 편지, "00야 사랑해"라고 써준 5세의 낭만이 가방에 한가득 실려왔다. 그리고 겨울 즘 되자 아이가 엄마에게도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내 아이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편지를 받았다. (엄마 포켓몬 갖고 싶어요. 를 쓴 거지만..ㅋ)
올해는 처음으로 내 생일에 아들에게 편지를 받았다.(T엄마의 보물상자에 들어가 있다.)
한글을 마스터하기 위해 집에서 참 해준 게 없다.
원에서 해주는 한글 학습이 다였고, 아이가 스스로 해냈다. 그저 배워서 익숙해져 가는 한글을 책으로 많이 읽어주고 있는 것뿐. 이건 한글 마스터와 특별히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도 책 많이 읽어서 한글 일찍 뗐냐고 묻는 질문에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해준 게 없어요. 원에서 배워왔던 거고요. 책 많이 읽는다고 한글을 빨리 떼 진 않더라고요. 하하."
혼자 잘 해냈어. 대견해 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