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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친해지길 바라!

Study of Green

Aloha.


현재까지 제 그림의 변천사는 크게 (1) 고등학교~대학교 기간 동안 교과 커리큘럼에 착실히 따라간 그림, (2) 학부 졸업 후 혼자 여러 형태로 고군분투한 시기, (3) 하와이 생활 시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림 그린 지 얼마나 됐다고 시기를 나누는 것이 조금은 민망합니다. 참 민망스러운 이 기간 동안에 놀랍게도 제가 별로 사용하지 않은 색깔은 녹색 계열입니다. 색을 만드는 데에는 큰 자신감이 있지만 어째서인지 녹색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하와이에서의 첫 학기.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은 한 교수님께서 저에게 왜 녹색을 사용하지 않는지 여쭤보셨습니다. 사실 이 질문을 받기 전까진 제가 색깔을 편식하는지 몰랐었기 때문에 많이 놀라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잠시 생각해 본 후 저의 대답은 ‘정물화나 풍경화 그릴 때와 같이 꼭 녹색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별로 선호하지 않는 색깔인 것 같다’ 였습니다. 교수님은 이 점을 굉장히 흥미로워하시며 어떤 점이 녹색이 날 불편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라 하셨습니다. 저는 주저 없이 녹색의 곤충, 사마귀가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사마귀 암수의 본능을 동화로 묘사했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읽은 후 상상력이 풍부했던 어린 마음에 사마귀만 보면 오히려 제가 사마귀에게 잡아 먹힐 것 만 같았습니다. 이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곤충 공포증으로 발전됐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생활 한 이후 지금은 웬만한 곤충들은 (조금은 무섭고 신경은 쓰이지만 태연하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사마귀만큼은 정말 무섭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신 교수님은 내가 좋아하는 녹색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 하셨습니다.


녹차 / 녹차맛 아이스크림 / 나뭇잎 / 야자수 / 산 / 잔디 / 그린티 프라푸치노/ 스타벅스


참 좋아라 하는 달달구리에도 녹색이 있고 보면 힐링이 되는 자연에도 녹색이 있었습니다. 저의 리스트를 보신 교수님은 안 좋은 것이 있으면 그 반대쪽에는 좋은 것이 있지 않냐며 좋아하는 걸 생각하며 녹색을 더 많이 의식적으로 써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의식적으로 녹색을 많이 사용하려 했었지만 어느 순간에 다시 녹색이 제 그림에서 잘 안 보이게 되었습니다. 아마 아직 마음 한 구석에 녹색이 온전히 자리 잡지 않은 듯합니다.

다시 연습하고자 종이를 꺼냈으나 녹색을 쓸 생각을 하니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해집니다. 그래도 내가 넘어야 할 산은 녹색이니 참고 그려봅니다. 그릴 수록 마음이 참 가벼워집니다. 그려본 그림을 보니 (여전히, 그리고 예상한 바와 같이) 다른 색깔의 비중이 높습니다. 언젠가 녹색과 제가 단짝 친구가 될 날이 오길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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