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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물들이는 트로피칼 핑크

여우비 (2021)

여우비 (2021) 73.1 x 117 cm, 판넬에 종이, 파스텔, 아크릴

참 다채로웠던 하와이의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솔솔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던 하늘은 소낙비가 내린 후 바라보는 일몰 하늘이었다. 물기를 한가득 머금은 하늘에 분홍색, 보라색, 그리고 연한 쪽빛의 향연이 펼쳐졌고, 무지개로 화룡정점을 찍은 후 해는 저물었다. 이때 촉촉하게 젖은 땅, 풀, 나무의 향기들과 어우러지는 비 내음 또한 일품이었다. 싱그러운 자연의 향기를 맡으며 촉촉한 하늘을 그저 바라만 봐도 자연의 색감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나면, 항상 욕심이 생겼다. 내 눈으로만 담을 수 있는 색감을 그림 속에 담아보고 싶다는 그런 욕심. 나도 어쩔 수 없는 환쟁이인가 보다.


분홍색, 보라색, 그리고 연한 쪽빛 중에서 내 마음속에 강하게 들어온 색깔은 분홍색이란 어감보다 '트로피칼 핑크' 란 어감이 더 잘 어울리는 그런 분홍색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분홍색'의 선입견은 항상 밝고 행복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색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핑크색'을 사용함에 있어서 늘 주저했었다. 이 밝은 아이를 어떤 색깔과 배치해야 되나 늘 고민이었다. 분홍색 자체는 참 이뻤지만, 나에겐 밝은 에너지를 감당해 내기가 어려운 색감이었다. 


하지만 물기를 한가득 담고 있는 트로피칼 핑크색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평소에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자신의 아릿한 마음을 아주 살짝, '실은 나도 이런 고민이 있어'라고 말을 걸며 보여주는 듯했다. 그렇다. 분홍색의 인간적인 모습이 내 마음속에 훅 들어온 순간부터 나의 팔레트는 더 넓어졌다. 결국 어떤 색이든 다양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데, 그동안 너무 색채이론에 빠져있어서 분홍색이 더 어렵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유치원 다닐 때는 분홍색을 사용하고 싶으면 주저 없이 (어른 시선으로는 과감하게) 사용했었다. 아이처럼 재미있게 그리라는 말을 학부 때부터 많이 들어왔는데, 이제야 조금이나마 그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아침에 봄비가 살짝 흩뿌렸다. 촉촉하게 젖은 풀향기와 잘 어우러지는 비 내음이 참 좋다. 

이 비 내음만 맡으면 내 마음속엔 하와이 하늘을 물들이던 연한 트로피칼 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독자분들 혹은 처음 방문한 분들은 꼭 트로피칼 핑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이 그림을 보며 비 오는 날 각자가 느끼는 '기분 좋은 색깔'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쾌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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