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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비

꽃잎이 비처럼 떨어지거나, 비가 꽃처럼 내리거나.

꽃비 (Flower Petal Shower), 2020, 캔버스에 아크릴, 122 x 122 cm, 현 Mayor's Office of Culture and Arts 소장


내가 추상화를 그리게 된 이유는 색깔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같은 색깔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의 문화적인 배경과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색 추상화의 매력을 생소하게 느끼는 분들에게 '추상화 길라잡이' 혹은 '추상화 101'과 같은 안내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우선, 나의 그림에는 정해져 있는 정답이 없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자유롭게 생각해보면 된다. 이 그림은 석사 학위 청구전 작품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여우비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그렸다. 그림의 전체적인 색깔 배치를 보면 화사한 분홍빛과 따뜻한 빨간색과 노란색이 주를 이루지만, 짙은 녹색이 강렬하게 왼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빨강과 화사한 연분홍, 그리고 그 밖의 붉은 계열 색깔들은 연지곤지를 하고, 한국 전통 혼례복을 입은 여우 모습을 생각하며 그려보았다. 그리고 왠지 다양한 꽃나무들이 여우의 앞날을 축복하며 꽃잎들을 하늘하늘 떨어트려 줄 것 같다. 신부인 여우에겐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날이고 행복한 날이니 화사하게 그려주고 싶었다. 따스한 노란빛 줄기들은 마치 여우를 비추고 있는 따스한 햇빛 같다.  벚꽃잎이 산들산들 봄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이 연상되는 '꽃비'란 단어가 이 따뜻한 장면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 같았다.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서 빗방울이 꽃잎이 떨어지듯 내리는 모습이나, 꽃잎이 빗방울을 머금고 바람과 함께 떨어지는 모습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색 추상화의 매력을 동시에 잘 담고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날을 보내고 있는 여우를 바라보다 보면 어쩐지 구름이 계속 신경 쓰이게 된다. 구름은 외사랑이 자신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끝나는 날이기에 한없이 슬프고 서글프며, 신랑인 호랑이에게 강한 질투심도 느낄 것이다. 무언가 자꾸 신경 쓰이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짙은 청록색으로 표현한 구름을 왼쪽 위에 배치했다. 물론 현실에는 녹색 구름을 볼 수 없지만, 그림에서는 내가 그렇게 표현하고 싶으면, 주저 없이 하면 된다. 그렇다면 왜 여러 감정들이 뒤얽혀있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녹색을 사용했을까?


보통 녹색은 '생명' 혹은 '신선함'과 같이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지만, 왜 부정적인 여러 감정들이 얽혀있는 구름을 녹색으로 표현했을까? 녹색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마호메트와 생명을 상징하는 색이었다고 한다. 사막이 있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녹색을 바라볼 때 신비로운 색이며 신성한 색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녹색은 십자군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가 생긴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에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발발한 종교 전쟁이다. 이때 녹색 깃발을 들고 오는 이슬람교들을 보며 그리스도교인들이 녹색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상상해보면, 적군이 내가 살고 있는 마을로 올 때, 적군을 상징하는 색 깃발을 보면 무섭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이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고, 유력하다고 생각한다. 색깔도 언어와 같이 시대를 살아가며 변화하기도 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시각언어, 즉 visual language라고 한다.  


풋과일 같이 덜 익은 과일이나 채소들은 보통 녹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녹색이 '독성'을 뜻하기도 한다. 녹색 마녀가 녹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법 솥단지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이 녹색의 독성 의미가 와닿을 것 같다. 일상에서 피망이나 브로콜리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골라서 먹으려고 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아마 이 아이들에겐 피망이나 브로콜리가 자신들만의 '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들을 잘 표현한 캐릭터가 바로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인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에 나오는 까칠이(Disgust)이다. 주인공인 라일리 앤더슨 (Riley Anderson)이 마주치는 여러 '위험'요소들을 잘 판단해서 라일리가 '안전'하게 하도록 하고, 까칠이의 특유의 예민함으로 라일리의 다양한 취향들을 은연중에 관여하기도 한다. 


구름의 여러 녹빛 감정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모습이 마치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네와 닮아있다. 즉, 녹색은 무조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기도 한다. 색 추상화를 볼 때는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개인적인 감정들과 경험들에 먼저 집중해보고, 그림의 제목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면 더 재미있게 그림을 볼 수 있다. 내 그림과 글을 읽는 잠시간 만큼은 자신의 다양한 감정 덩어리를 꺼내보고 자신의 마음을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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