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로하메이 Jan 03. 2019

무지개의 나라에서 보내는 편지

저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행이 아닌 해외 생활은 처음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프지만요. 여행자의 신분이지만 조금씩 현지인들의 생활을 따라 하며 이곳에서 적응해 나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여행자와 체류자 그리고 생활자의 교집합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험의 합집합은 밀려오는 파도에 젖어드는 모래처럼 하루하루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하와이에서의 오늘을 기록하고 내일을 기대하며 하루를 일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죠.


바다에 누워있는 시간만큼, 바다로 가기 위한 시간도 필요하겠죠.


하와이에 도착한 다음 날 은행에 갔습니다. 한국에서 이미 환전은 했지만, 해외에서 사용되는 체크카드를 만들고 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여행자의 전 재산을 게스트하우스에 두고 다닐 순 없는 노릇. 입출금 계좌와 데빗카드(Debit card)로 불리는 체크카드가 필요했습니다.


은행으로 출발하기 전, 머릿속으로 통장을 만들겠다는 문장을 몇 번이고 만들어 봤습니다. 거기다 제대로 된 표현이 맞는지 번역기도 돌려봤습니다. 여행지에서 소비를 목적으로 하던 짧은 영어 대신 생활자의 영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여권과 함께 떨리는 마음으로 숙소 근처의 Central Pacific Bank를 찾았습니다. 준비된 자세로 출입문을 밀고 들어간 저를 맞아준 건 놀랍게도 재미교포 직원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한국어보다 영어로 대화하는 게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한국어 사용 찬스가 가능해 저는 수월하게 계좌를 오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게스트하우스로 입출금계좌와 체크카드가 도착했습니다. 한국과 다르게 하와이에선 외국인 여행자도 주소만 있다면 계좌를 만들 수 있는데요. 제집은 아니지만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주소가 저를 증명해줬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을 때는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습니다. 무거운 캐리어에 겨우 넣고 온 여행책자가 아니라, 원하는 책을 선택해 마음껏 읽게 되었으니까요. 숙소 근처인 맥컬리도서관에는 한국 책 코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생각보다 꽤 많은 책이 마련되어 있는데요. 도서관 카드 덕분에 활자를 훑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가슴에 새길 수 있게 됐습니다. 하와이에 오면 시간에 구애 없이 꼭 여유롭게 책을 읽겠다고 한 다짐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죠.


여행자의 시선으로 와이키키의 석양을 즐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생활자의 시선으로 마트의 가격을 비교하고 장을 봅니다. 게스트하우스에 새로 온 친구로부터 놀라운 정보를 접했는데요. 한국과 다르게 멤버쉽카드가 있다면 마트마다 다른 가격으로 큰 폭의 추가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까다로운 회원가입 대신 핸드폰 번호만 있으면 누구나 간단하게 회원이 될 수 있는데요. 저는 세이프웨이(Safeway)라는 마트와 롱스(LONGS)라는 드럭스토어에서 멤버쉽카드를 만들었습디다. 똑같은 주스를, 통조림 캔을, 휴지 하나를 사는데도 가격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습니다.



멤버쉽카드의 바코드를 찍으면 저는 책을 빌릴 수 있고, 할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여행자들이 발급받을 수 있는 카드지만, 제 이름으로 된 카드들이 생기자 이상하게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멤버쉽카드에는 Serah라는 제 영어 이름과 하와이 지역 번호인 808로 시작하는 핸드폰 번호가 저장되어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낯선 여행지를 잠시 스쳐 가는 게 아니라 생활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묘한 소속감을 들게 합니다.


저도 하와이에 알로하 멤버쉽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쓰고 내일 우체국에 가는 이야기들까지. 앞으로도 계속될 여행의 크고 작은 순간들은 하와이를 기억하는 바코드가 될 것입니다. 알로하 멤버쉽의 유효기간은 영원한데요.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여행의 바코드를 찍으면 무지개처럼 하와이에서의 추억들이 펼쳐지길 기대해봅니다.



하와이의 속도

한국에서 저는 2배 가속 플레이 버튼이 눌러진 것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성격이 급한 탓도 있었지만, 바쁜 업무를 쳐내다 보니 점점 더 빠르게는 당연한 제 삶의 속도였습니다. ‘어떻게 말을 그렇게 빨리하나요? 벌써 마무리했어요? 걸음이 참 빠르네요.'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언제나 스피드여왕이었던 제가 하와이에선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속도가 더딥니다. 평소의 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속도이지요. 그런데 이 느림의 속도가 생각보다 저와 참 잘 맞습니다. 아마도 저는 점점 더 느리게라는 삶의 속도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fermata(페르마타)
원래 박자보다 더 길게 연주하는 주법
잠시 늦추거나 멈추도록 지시하는 표


아침이면 반복해서 울리는 알람을 끄고 허겁지겁 출근하기 바빴습니다. 침대엔 책과 쿠션, 베개와 이불이 항상 뒤엉켜 있었죠. 하와이에선 자고 일어난 침대를 정리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마치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듯이, 시트를 정리하고 베개도 제자리에 놓습니다. 외출하고 돌아와 잘 정돈된 침대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다시 침대 위를 함부로 어지럽히지도 않게 됐습니다.


하와이에서 저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습니다. 귀찮다는 이유로 대충 떼우던 인스턴트 음식과 스트레스 해소 명목 하에 허용됐던 야식이 사라졌는데요. 사실 가난한 여행자가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하와이에서 매끼를 밖에서 사 먹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건강한 식단은 시작됐죠. 어디서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를 만들고 나갔습니다. 과자 대신 미니당근과 사과가 샌드위치 백에 담겼습니다. 텀블러엔 커피 대신 얼음물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화려한 도시락은 아니지만, 돗자리 위에서 바다를 마주하고 먹는 점심은 매일매일을 피크닉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하루에 한 번씩 서핑을 합니다. 매일 뜨거운 태양 아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운동을 한 덕분에 잠도 푹 자게 됐습니다. 저는 TV도 보지 않고, 한국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인터넷도 웬만하면 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다로 나가 파도를 보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야자수를 부드럽게 스쳐 가는 바람을 느껴봅니다.  


 저는 지금, 하와이에 있으니까요.




<하와이 로망일기, 와이키키 다이어리>     

평범한 대한민국 30대가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떠났던 하와이 한량 생활기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하와이를 만나고 돌아온 85일간의 와이키키 다이어리가     

궁금하시다면 링크를 눌러주세요! Aloha.           

       

1. Aloha from the Hawaii https://brunch.co.kr/@alohamay/1     

2. 당신이 꿈꾸는 파라다이스의 주소, ALOHA STATE https://brunch.co.kr/@alohamay/4     

3. 불시착, 그 순간의 기록 https://brunch.co.kr/@alohamay/5     

4. 와이키키 가는 길(TO WAIKIKI) https://brunch.co.kr/@alohamay/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