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에서 하와이로
잔뜩 움츠렸던 몸을 택시에서 꺼내자마자 후드티 사이로 더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긴 입국심사에 지쳐 몸과 마음의 피로도는 이미 최고조, 시차까지 더한 멍한 상태인 나를 치고 들어온 건 날씨만이 아니었다. 바로 뒤이어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하와이가 잽을 날린 것. 택시가 떠난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주소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그렇게 입국심사를 어렵게 통과한 미국이 맞아? 하와이가 아니라 남미 한가운데 떨어진 것 같은데?'
야자수가 즐비한 해변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와이키키에서 떨어진 주택가에 게스트하우스가 있다는 건 한국에서 예약할 때부터 알던 사실이다. 하지만 상상했던 미국의 풍경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하얀색 울타리에 둘러싸인 아담한 정원, 차고가 딸린 이층 집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이좋게 맞댄 지붕 아래 마시멜로 같은 페인트가 칠해진 우유 팩 모양의 단독주택, 그것이 전형적인 미국의 하우스가 아니었던가?
표정 없이 서 있는 낡은 주택들은 미국에 대한 환상과 하와이에 대한 기대를 통째로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여행 책자에서 소개되는 아름다운 해변도, 영화나 드라마에선 보던 한가로운 주택가도 그곳엔 없었다.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맥컬리(Mcculy St)는 오래된 주택가였다. 1층에는 리쿼스토어(주류판매점)와 같은 작은 상점들이, 2층에는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다세대 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만약 내가 일주일 단기여행자였다면 비싼 숙박비를 내더라도 와이키키의 호텔을 예약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반전의 풍경을 마주할 수 없었겠지. 와이키키라는 여행자의 장소와 맥컬리라는 생활자의 주소는 오아후라는 같은 섬 안에 있지만 다른 모습이었다. 나의 첫 번째 미국은 화려한 뉴요커의 세련된 뉴욕과도,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꿈의 도시 LA와도,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보스턴과도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넓은 공간과 다른 시간만큼 여러 조각이 모여 하나의 미국을 만드는 것일 테니까. 나는 그 조각 가운데 겨우 하나를 들어 올렸을 뿐이다.
하와이에 왔으니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은 와이키키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TO WAIKIKI'라고 적힌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거리의 풍경을 익히며 발걸음을 옮기다 생소한 장면을 맞닥뜨렸다.
‘하와이=바다'라고 생각하는 나의 시야에 거대한 물줄기가 들어왔다.
반짝이는 물살을 가르며 훈련이 한창인 조정 선수들. 그 운하를 따라 자전거를 타거나 가볍게 달리는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다소 하와이스럽지 않은 광경에 순간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키가 큰 야자수마저 없었다면 어딘가로 순간이동을 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유유히 흐르는 물살은 도시를 관통하고 나의 좁은 세계관으로 들어왔다. 나는 다른 누군가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본 세상을, 그것도 순간적으로 기록된 장면만을 내가 아는 세계의 전부로 믿고 있던 것이다. 마치 경험한 것처럼 이미지를 사실화한 채,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졌다. 순수와 무지 사이의 자신에게. 대표적이거나 혹은 상징적이라는 표현의 이면에 대한 의심이나 호기심을 가질 수 없었는지…
운하에서 봤던 높은 빌딩들이 있는 칼라카우아 애비뉴(Kalakaua Ave)에 들어서자 도시는 표정을 바꿨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본 화려한 명품 매장과 유명 호텔, 건물 중앙에 야자수가 솟아 있는 쇼핑몰, 유행의 스피드를 올리는 스파브랜드, 운치 있는 야외 테이블의 레스토랑이 번화한 거리에 가득 담겨있었다. 북적이는 관광객들과 거리의 예술가들까지 더해져 와이키키는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낯선 여행지의 화면 전환에 적응하느라, 체력 배터리의 방전도 모른 채 걷느라 지쳐버렸다. 강렬한 자외선은 뜨거웠고 얇은 조리를 신은 발바닥엔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우아한 그녀가 나타났다.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하얀 기둥의 고풍스러운 건물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야자수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첫눈에 반한 호텔의 외관보다 나를 울컥하게 만든 건 1층 야외 테라스였다. 흔들의자에 앉아 커피나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바람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와이의 바람을 닮아 있었다. 최고급 호텔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부의 소유보다 부러운 건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급하게 쫓지 않아도 된다고, 사라지지 않는 하와이를 즐기라는 듯이 나에게 미소를 던졌다.
와이키키를 가로지르는 바람과 햇살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달콤한 음악이 흐르는 곳에 도착했다. 대형쇼핑몰의 야외무대에선 훌라 공연이 한창이었다. 잠시 구경하다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나를 반겨주는
하와이의 환영을 담은 무대였기 때문에…
길었던 비행시간과 힘들었던 입국심사는 그렇게 사라져 갔다.
하와이 특유의
달콤하고 미적지근한 공기를 접한 순간부터
변화는 시작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 댄스 댄스 댄스 中 –
<하와이 로망일기, 와이키키 다이어리>
평범한 대한민국 30대가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떠났던 하와이 한량 생활기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하와이를 만나고 돌아온 85일간의 와이키키 다이어리가
궁금하시다면 링크를 눌러주세요! Alo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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