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31일
작년 겨울, 아빠가 촬영 때문에 머무는 진도를 찾았을 무렵의 이야기.
아빠는 촬영 당일에 모일 마을 사람들에게 (밤샘 촬영이 될 테니) 간식 삼아 팥죽을 내놓고 싶다 했었다. 달력을 보니 동짓날이었다. 말 한마디 던지면 뚝딱 만들어질 것처럼 말하는 아빠 앞에서 나와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절대 안 된다 엄포를 놓았다. 진도에서 한 시간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조도에서. 그 머나먼 어촌마을에서. 누가 팥을 쑤고 누가 새알을 빚는 단말인가. 70인분을. 잠자코 있는 내게 아빠가 슬쩍 또 물어왔다.
"내려와서 새알 좀 빚을 생각 있니?"
그러나 아빠는 해냈다. 촬영 당일 마을 노인회관에 가보니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반죽 거리가 있었다. 이미 삼삼오오 모여 한 켠에선 팥 한솥을 끓여내고 있었다. 방구석에 빙 둘러앉아 너도 나도 누가 예쁘게 만드나 새알을 빚고 있다. 그 작은 노인회관이 북적북적 거리기 시작하며 구수한 단내가 채워진다. 좀처럼 보지 못할 풍경을 눈에 담으며 역시 아빠군, 되뇌였다. 물론 우여곡절은 있었다고 한다. 하기사 한솥 팥죽거리 재료를 이곳에 모으는 것도 시골마을에선 쉽지 않다. 팥죽 하나 대접하는 것도 내 맘처럼 굴러가지 않는 세상이네, 생각했지만 결국은 또 해내는 아빠를 보며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오늘 오전에 일본 출장이 급 잡혔다. 오후엔 친한 동생과 한 달 전부터 잡아놓은 약속이 파토났다. 일본은 정말 예상하지도 못했던 연락이었다. 11시 20분 걸려온 선배의 전화. 파토난 약속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 주에 한 번씩 약속을 까먹은 것 아니지? 서로에게 확인 또 확인을 하며 신신당부했던 약속이니까. 결과적으로 야근할 확률은 100% 없다고 단언했던 동생은 오후 10시에 사무실 인증샷을 보내며 내일도 출근이라 투덜거렸다. 야근하다 약속을 파토내는 마음,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전혀 신경 쓸 거 없으니 다음에 보면 되니 일에 집중하라고 카톡을 끝냈다.
누구나의 일상에서 있을 법한 돌발상황과 산산조각 나는 약속의 파토. 별 거 아니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말이다. 참 신기하다. 빡세게 신명 나게 일 좀 하고 싶은데 뭐 없을까. 연초부터 머리만 굴리고 있었는데 이런 기회가 찾아온 것도 신기하고. 동생과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며 불금 보내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수십 번도 더 상상했건만 그건 사라진 일이 돼버렸다.
팥죽 같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촬영 현장은 팥죽이 있음으로 비로소 완성된 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약방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팥죽이. 새알 대여섯 개 넣은 걸쭉한 팥죽 한 그릇에 싱싱한 김치 한 대접 내놓는 게 생각보다 쉽진 않아 많은 사람들의 손이 필요했지만 해내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사실 못할 것도 없다. 만들어져야 할 건 어떻게든 만들어지게끔 하늘은 도와준다.
생겼다가도 없어지고 없었다가도 생겨나는 무수히 많은 이벤트들로 만들어지는 인생의 강줄기처럼. 그날의 팥죽처럼.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에 연연하지 말았으면. 내 인생에 필요한 팥죽은 뭔지, 팥죽을 대접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군지 잘 가려내며. 내일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2월엔 팥죽 한 그릇 정성스레 만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