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군의 비밀
대학 때였다. 배드민턴부에 KY가 있었다. 한 선배가 "쟤가 KY잖아" 하길래 코야마 유우지 뭐 그런 이름인가 했다. 하마터면 본인한테 물어볼뻔했다. "네가 KY야?"
일본에서 KY란 눈치 없는 사람을 칭한다. [空気Kooki 読めない yomenai] 문장의 앞글자만 따왔다. 공기를 읽지 못한다는 뜻이다. KY라는 말은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눈치없다는 말을 면전에 대고 뱉긴 쉽지 않지만 아무래도 외래어다보니 다소 장난기 섞인 말투로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일까. 돌려말하고 또 돌려말하는 일본 화법에 숨통을 트게 해 준 분출구 역할을 해준듯 싶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공기란? 분위기다. 대화의 맥락, 흐름, 감정이 뒤섞어 만들어진 분위기. 그걸 읽어내면 공기를 읽는 사람이 되는 거다. 우리나라에선 눈치가 왜 이렇게 없어, 눈치 좀 챙겨, 눈치가 있는 친구네, 등등. 눈치라는 게 마치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마땅한 재능을 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치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또는 어떤 주어진 상황을 때에 맞게 빨리 알아차리는 능력, 혹은 그에 대한 눈빛]인데 사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다. 9개월 즈음부터 그 능력이 생기기 시작한다. 가령 엄마가 아기에게 이거 좀 봐봐,라며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면 아기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가는 것을 뜻한다. 아기가 엄마의 의도를 파악하기 시작하면 [반복해서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패턴을 발견하는 능력]이 절로 생긴다. "이것 좀 봐봐, 이유식이야"라며 밥먹는 행동을 반복한다면 아기는 이거 좀 봐봐, 했을 때 곧 이유식을 먹겠구나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는 거다. 자라면서 아이는 이 능력들을 점점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언어라는 건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 생각을 마음껏 공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모든 걸 언어에 담을 순 없는 노릇이니 분명 한계는 있다. 분위기를 읽어내는 능력,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은 그래서 필요하다. 언어란 건 정보전달의 기능도 하지만 사람들 간의 관계성을 유지시키는 기능도 하고 있다.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는지는 문화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서양 쪽 문화권이 정보전달 기능을 중요시한다는 말이 있다. 언어 표현도 명확한 걸 좋아한다. I want you처럼. 단도직입적인 것. 직설적인 것.
한국이나 일본은 관계성을 유지하는 쪽에 조금 더 비중을 둔다.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뜻에서 "당연히 아시겠지만..."라고 말문을 연다 거나 굳이 주어를 쓰지 않아도 누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다 통한다고 생각하는 경향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이 눈치라는 것도 서양 문화권보다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좀 더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는 거다.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언어 외적인 부분에 암호처럼 숨어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니까.
일본에 察し(sassi)라는 표현이 있다. 헤아림, 이해력, 통찰 혹은 짐작을 뜻한다. 상황을 읽어내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객이 왕!이라고 외치는 접객 문화에선 察し(sassi)가 굉장히 중요한 수단이 된다. 얼마나 손님을 파악하고 상황을 읽어내는지에 따라 고객만족도가 높아진다는 거다. 이 논문을 썼던 당시 난 일본의 한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내 논문엔 고깃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예문과 사례로 자주 등장한다. 교수님이 논문에서 고기 냄새나는 것 같다며 웃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가장 적나라하게 살아있는 문장들이 기록됐다.
아르바이트는 굉장히 좋은 관찰의 장(場)이 돼주었다. 특히 점심시간은 손님 대부분이 한정된 시간 내 식사를 마쳐야 하는 상황이기에 '한 시간 동안 몇 번의 察し(sassi)가 필요할까' 그날의 화제를 정해놓고 주방에서 기록하곤 했다.
물컵에 물이 비어있으면 따라준다거나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으면 식사 전에 앞치마를 미리 건넨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다 싶으면 재떨이를 슬그머니 내민다. 손님이 필요로 할 것 같은 걸 시키기 전에 하는 거다. 내게 요청이 들어오기 전에 해야 察し(sassi)로써 의미가 있다. 물 좀 주세요, 하고 손 든 손님에게 다가가 물을 따르는 건 그냥 요청에 의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까. 타이밍이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일본어로 '눈치'는 뭐라고 할까, 찾아봤을 때 너무나 많은 표현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란 적이 있었다. 헤아림이 좋다(察しがいい), 안색을 살피다(顔色を伺う), 공기를 못 읽는다(空気が読めない)처럼 공기, 안색, 분위기, 흥 같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안색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의미한다. 장(場)이다. 개개인보다 전체적인 흐름, 눈앞에 있는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한국말은 '눈치'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표현이 가능하다. 일단 눈치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눈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니. 그래서 세워진 가설이었다. 눈치라는 개념이 일본에선 분위기, 맥락, 분위기 같이 광범위한 어떤 큰 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한국에선 좀 더 개개인에게 맞춰져 있다는 주장은.
이 논문을 썼던 건 2014년. 굉장히 호평을 받았던 논문이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 자신이 없었던 논문이기도 했다. 난 흑백논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일본은 이렇다, 한국은 저렇다, 고 말하는 걸 굉장히 꺼리는 편인데 한국인인 내가 일본에서 논문을 써야 하니 내 강점은 한국의 무언가와 비교분석을 하는 일이었고 '눈치'라는 개념이 우리나라 못지않게 중요한 미덕으로 여겨지는 일본이었던 터라 다들 흥미롭게 읽어주기도 했던 논문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도 종종 내가 세웠던 논문의 가설이 맞나 직장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제삼자가 되어 관찰해보곤 하는데 그래도 썩 많이 엇나가진 않는 것 같아 오래 묵혀뒀던 논문집을 다시 꺼냈다. 종종 풀어봐야지.
참고 : Tomasello, M. 2003. Constructing a language: A usage-based theory of language acquist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