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게임
미생에 장그래가 상사맨이 되고 가장 먼저 울컥했던 단어는 '우리'였다. 옆 부서 과장에게 '너네 애가 실수해서 우리 애만 혼났잖아' 정작 본인은 기억도 못하는 오 과장의 취중진담. 옆에서 오 과장을 부축하던 장그래는 감동을 받고 며칠 동안 우리, 우리, 우리, 라는 단어를 몇십 번이고 되새긴다. '우리'라는 말이 실로 그렇다.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단어. 한순간에 내편, 내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단어.
일본어로 [ウチ uchi], [ソト soto]라는 말이 있다. 한국말로 하면 전가는 [우리] 후자는 [남]에 가깝지만 정확히 번역하자면 [ウチ uchi]는 안쪽, 내부를 [ソト soto]는 바깥, 외부를 의미한다. 일본에서 말하는 [ウチ uchi]와 한국말 [우리]는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정(情)이라는 개념을 놓고 봤을 때 온도차가 있다. 일본의 오오자키라는 학자 이야기를 빌리자면 일본에선 아무리 친해도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극도로 꺼리는 반면 한국사람들은 직설적이고 뜨겁고 열정적인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다고. [ソト soto]라는 범위에 속한 사람들에게 냉정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다른 민족으로부터 지배받은 경험이 없다 보니 엄밀히 말하면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몇 번이고 침략이란 역사를 경험한 탓에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극도로 신중해진다고 그는 해석했다.
오오자키는 [ウチ uchi]를 둘로 나눴다. 내내집단(内内集団)과 내외집단(内外集団). 그리고 나머지는 [ソト soto].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다. 결혼식을 예로 들어보겠다.
일본 친구 결혼식에 초대받은 적이 몇 번 있다.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는 몇 달 전에 우편으로 청첩장을 보낸다. 해당 날짜에 참석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기 위함이다. 참석에 동그라미를 친다면 혹시 알레르기는 없는지 채식주의자인지 섬세한 메뉴 체크까지 하게 되어있다. 오직 그 사람을 위한 식사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결혼식장에 갈 땐 예의를 갖춰야 한다. 여자애들은 보통 미용실에 가서 올림머리로 단장을 하고 단정하면서도 피로연에서나 볼 법한 스커트를 입는다. 색깔은 우리나라 여자 하객들과 비슷한 남색, 회식, 검은색 계열.
그렇게 한참 단장을 하고 도착한 예식장. 내 이름이 쓰여있는 자리에 가서 앉는다. 식이 진행되는 건 커플마다 다르지만 장장 두 시간 동안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코스요리가 나오고 사이사이에 하객들의 스피치(신랑 신부와 하객들에게 짧은 소감 한 마디)를 갖는 시간, 게임을 하는 경우도 있고 만담을 한다거나 축사 영상을 틀어놓기도 한다. 애주가인 내 친구 결혼식엔 10년 지기 바텐더를 초빙해 여성 하객 대상으로 '사랑의 칵테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돌아갈 땐 하객 한 명 한 명에게 답례품이 주어진다. 와인잔, 찻잔세트, 지역특산품 등등. 축의금은 기본이 3만 엔(30만 원), 5만 엔 7만 엔으로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하객이나 신랑 신부 양쪽 다 거금을 들이는 예식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소수만 초대한다는 것. 축의금에 대한 부담도 한몫할 것이다. 초대받으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데, 초대에 응하자니 30만 원을 내야 한다. 그 정도의 사이가 아니면 초대를 하지도 응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식에 초대할 정도라면 [ウチ uchi] 중에서도 가장 안쪽 밀접한 관계인 내내집단(内内集団)일 가능성이 크다. 가족, 친척, 친한 친구, 친한 동료가 해당된다. 그 외 직장이라는 같은 소속집단을 가진 동료, 선후배들이나 모교의 동창들, 어느 한 테두리를 교집합으로 가지고 있는 지인들까지 내외집단(内外集団)에 해당한다. 나머지는 다 바깥양반들이다.
오오자키의 말에 따르면 일본 사람들은 이 바깥쪽에 속하는 [ソト soto]의 부류에겐 양보 따위 없고 할 말은 다 할 정도로 관계성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지나가는 행인이나 모르는 사람에게 극도로 무관심한 면은 여기서 나오는 건가 싶다. 나와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사람들. 하지만 내가 고깃집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입장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일단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나에겐 손님이 된다. 손님은 바깥에 속해있는 부류지만 내가 속해있는 장(場)에 들어옴과 동시에 우리의 관계는 [직원]과 [고객]이 되고
나는 고깃집이라는, 돈을 주고 요리와 서비스를 파는 장(場)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지는 거다. 좀 불쾌한 사람일지라도 손님인 이상 내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게 그들의 문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