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눈치 좀 챙겨!
테라스하우스 시리즈 중 코스트코 사건이라는 게 있다. 오래전 방영됐는데 여전히 패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에피소드. 한 여자를 마음에 들어하는 남자가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해 슬슬 시동을 거는 장면 속 대화다.
남 : 우리 어디 놀러 갈까?
여 : 코스트코 가기로 하지 않았어?
남 : 코스트코?
여 : 다 같이 코스트코 가기로 했던 것 같은데.
남 : 코스트코는 좀... 난 지금 데이트 신청하려고 한 건데.
여 : 아, 데이트?
남 : 내가 코스 짜 놓을게. 차로 가자. 어디든 멀리.
여 : 멀리?
남 : 응, 운전해서 갈 수 있는.
여 : 코스트코는? 안 가고?
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다. 최대한 불편한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거절하는 중이다. 멀리 가긴 싫고 단 둘이 가는 건 더욱 부담스럽다. 남자의 의도를 알면서도 빙빙 돌려가며 코스트코를 들이대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본인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생각하는 모양. 단도직입적으로 단어를 꺼내 든다. 데이트라고, 둘이 가는 거라고, 운전을 하겠다고.
이 일화가 나간 뒤 미국의 한 언론사에서 테라스하우스 패널에게 인터뷰 의뢰가 들어왔단다. 직설적인 화법에 익숙한 그들에겐 저 여성의 뉘앙스가 전달되지 않았던 거다. 인터뷰 첫 질문은 "일본에선 코스트코가 데이스 코스예요?" 였단다.
"미국에서 코스트코는 식자재를 구입하러 가는 곳인데 해당 에피소드를 보니 남성이 데이트 신청을 할 때 여성이 '코스트코에 가자'라고 답하더라. 일본 여성들은 코스트코에서 데이트가 하고 싶은가 보다,라고 이해했다. 실제로 코스트코가 있기 있는 데이트 코스인가?"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는 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폭소를 터뜨리지만 직설적인 화법에 익숙한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법도 하다. 인터뷰에 응했던 일본인 패널은 "해당 여성이 남성에게 '나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간접적인 NO를 표현하기 위해 코스트코라고 답한 것."이라며 해명했다고.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 중 笑って waratte ごまかす gomakasu라는 관용어가 있다. 웃음으로 때우거나 웃어넘기는 행위를 뜻하는 말인데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 자주 들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블라우스 가슴팍에 성을 적은 명찰을 달아야 했다(일본은 보통 성으로 부른다). 내 성은 버들 유(柳). 일본에선 굉장히 드문 성 씨다. 화로식 고기구이집이었기에 회전이 느린 편이었고 자연스레 서버와 고객이 말 섞을 일은 많았다. 명찰 한 번 내 얼굴 한 번 본 손님들은 물었다. 야나기 씨야? 류 씨야? 한국에서 왔다고 답하면 끝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귀찮거나 싫은 적은 없지만 가끔 곤란하거나 민감한 혹은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정색하고 응대할 순 없는 노릇이라 자주 애용했다. 웃으며 얼버무리기.
정확히 번역하자면 '웃어서 속인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는 뜻이니 능구렁이 같은 이미지다. 하지만 웃고 얼버무린다는 건 더 이상 이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는 뜻도 된다. 그 의도는 열이면 열 전달된다. 그 의도를 알고 대답을 회피하냐며 분노할 순 있겠지만 (다행히 그런 사람은 없었다) 미소의 의미를 못 알아차린 경우는 없었다. 짓궂게 질문을 이어간다거나 기쁨에서 나오는 미소라 착각하고 대화를 이어가려는 손님도 없었다.
눈치채 주길 바라며 간접적으로 말한다는 건 사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하진 않은 일이다. 듣는 사람 또한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왜 내 말이 전달되지 않고 있는 건가 단순 명확하지 않으니 피곤할 따름이다. 지금 이 멘탈을 가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웃으며 얼버무리진 않았을 것 같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좀 더 능숙하게 뻔뻔하게 그럴듯한 말로 의사를 전달했겠지. 깡이 생긴 건지 얼굴이 두꺼워진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눈치를 보며 살았다는 건 잘 보이고 싶어 했던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상대방의 감정에 상처를 주기 싫은 거라 포장하지만 사실은 싫은 사람에게 조차 미움받기 싫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