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좀 빼봐

2020년 2월 6일

by 알로

첫 출장은 도쿄였다. 제2 롯데월드 공사가 한창이던 여름. 도심 곳곳에 싱크홀이 발생했을 때. 일본의 싱크홀 전문가를 찾아 떠났던 도쿄였다. 요즘도 이따금씩 한국을 찾을 때면 "잘 지내냐, 시간 되면 차 한 잔 하자"라고 연락을 꼬박꼬박 넣어주는 스가 선생님도 그때 만난 인연이다. 그는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싱크홀 전문가다.


두 번째 출장은 후쿠시마였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 한국에 들어오는 수입폐기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수출국은? 일본이다. 왜지? 궁금했다. 특히 폐타이어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폐타이어를 연소시켜 시멘트 공장의 연료로 쓰기 위함인데 왜 굳이 수입을 하냐. 국내에서 유통하는 것보다 훨씬 싼 값에 얻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서울에서 강원도 가는 것보다는 일본에서 배로 오는 게 싸니까) 폐타이어 본사가 죄다 도쿄다. 그럼 문제 될 게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공장을 찾아보니 후쿠시마다. 그렇다. 후쿠시마에서 나뒹구는 폐타이어들을 국내로 수입하고 있던 거였다. 도쿄에서 유학하던 시절 잠깐이었지만 생수도 쌀 한 톨도 죄다 한국에서 시켜먹었던 나다. 예민하다. 그런 내가 후쿠시마를 가서 물 한 방울 마음 놓고 먹을 수가 없었다.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출장이다.


세 번째 출장은 나고야. 왜 우리나라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걸까? 라는 원초적인 질문의 답을 찾으러 일본 내 노벨상 수상자들을 만나고 왔다. 단발성과 한결같음의 차이였다. 끄덕끄덕. 수긍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고질적인 병. 한 가지 연구를 3대째 이어온다는 건 연구성과에 대한 욕심을 후배에게 넘겨줄 여유가 있다는 건데 과연 우리나라에서 가능한 이야기일까. 한 가게가 한 골목에서 100년을 살아가는 나라와 10년도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는 나라. 젠트리피케이션이나 상권이란 범주에서 벗어나 생각했을 때.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 그런 저런 생각들로 가득 차서 돌아오는 길 마음이 무거웠던 출장.


네 번째는 혐한 와사비 테러로 오사카를 찾았던 일주일짜리 출장. 첫날 호텔에서 먹었던 조식은 샛노랗게 말아 올린 계란말이와 따뜻한 된장국, 노릇노릇한 연어구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실고실한 흰밥이 들어있는 도시락이었다. 방으로 직접 배달해줬다. 다음날 (하필 우리의 여권을 가져간 직후) 배달된 조식은 된장국과 밥, 그리고 김 한 봉지였다. 호텔 주인으로부터 혐한 테러당한 것 아니냐며 분노했던 기억. 하지만 방송은 나가지 못했다. 귀국하자마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됐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최단기 1박 2일 출장. 밀착카메라로 처음 갔던 출장이라 기억에 남는다. 포항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의 지진 방지대책을 취재해오란 지시로 날아갔던 고베. 고베 지진 당시 생존자와 만났던 두 시간짜리 인터뷰가 아직도 생생하다. 많이 울었다. 마음속으로.


여섯 번째는 조선학교. 2019년 가장 기억에 남는 출장이었다. 할많하않은 이런 출장에 딱 어울리는 단어다. 인생을 살면서 전환점이 되는 몇 가지 이벤트를 꼽으라면 아마도 서너 번째쯤에 들어갈만한 시간이었다.


일곱 번째는 대마도. 한국사람 싫어요 두 손 두 발 다 들고 격하게 한국인을 밀어내는 대마도 상권을 취재하러 갔었다. 쉽지 않았다. 촬영 중에 한 한국인이 일본어로 일본 사람인척 우리에게 욕했던 게 생각난다. (왜 모를 거라 생각한 거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같이 있던 스텝들에게 하나하나 통역해주지 못했다. 차마.


여덟 번째는 오사카. 그러고 보니 오사카를 참 자주 갔다. 일본 내 지방선거가 시작됨과 동시에 불매운동이 아직 자리도 잡기 전인 7월. 사장의 제안으로 떠났던 출장. 일본인들의 속내를 들으러 간 컨셉이었는데 굉장히 기억에 남는 출장이었다. 한국에서 불매 운동하는 것 어떻게 생각하나. 수출규제와 강제징용에 대한 법원 판결, 아베 정권의 선거홍보(혐한 발언) 등과 관련해 질문했을 때 예상치 못한 답들이 많이 나와 적잖게 당황했었다. 아예 한국어로 답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공부했다고. 한국 좋아서 독학했다고. 아베 정권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다고. 오사카는 재일교포가 일본 내 가장 많은 도시라 그런지 확실히 도쿄보다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란 인상을 많이 받았다.


아홉 번째는 후쿠시마. 도쿄올림픽을 부흥의 계기로 삼으려는 아베 총리. 그런데 정말 믿어도 돼? 안전한 거 맞아?라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겠지 싶다. 나 역시 궁금했다. 알아보러 갔다.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 번째. 내일 간다. 오키나와다. 그간 다녀온 출장을 하나하나 적고 보니 당시 기억들이 새록새록. 이번 출장 다녀와서 한 번 쫙 적어봐야겠다. 모든 출장은 2,3일 전 혹은 하루 전에 정해졌었다. 늘. 후쿠시마는 조금 여유 있게 준비했지만. '내일 당장 비행기 타고 가라' 아무리 일본이 가까워도 참 익숙해지지 않는 말이었다. 늘 출장 전은 속이 불편했다. 체하거나 두통이 오거나 하루 종일 배가 아프다거나. 긴장의 표시겠다. 오늘도 하루 종일 그랬다. 잘 해내고 싶다, 재밌게 만들고 싶다, 어떤 예상치 못할 일들이 일어날까. 결국은 힘을 빼면 되는데 말이다. 힘 빼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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