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웃기만 하니?

by 알로

털었다. 아니, 다 털었나? 사실 모르겠다.

소셜라이브를 본 엄마가
“넌 웃기만 하니. 너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었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가장 안 들었으면 하는 말이기도 했다.

11시간을 촬영하고 20분 정도 방송에 나갔다. 재일동포들이 70년간 이루어낸 역사의 단면을 11시간에 담아낸다는 것도, 11시간의 촬영본을 20분으로 줄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말 많았다.

난 파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빡세다는(?) 백마부대가 있는 그곳이다. 접경지역까진 아니더라도 우린 늘 군부대에 위문공연을 갔고 일주일에 한 번씩 군인 아저씨께 편지를 썼다. 밤이면 대남방송을 들으며 잠을 청했고, 학교가 끝나면 삐라를 주우러 다녔다.

난 공부를 싫어했기에 삐라 줍기 우수생으로 매달 표창장을 받았다. 소풍은 땅굴로, 6.25날엔 이승복 어린이 박물관에 가는 게 연례행사였다. 내 또래도 공감 못 하는 유년 시절이다 보니 북한에 대한 위화감, 이질감은 또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다. 조선학교에 평소부터 관심을 둔 것도 아니었다. 신기하지만 좀 벽이 느껴지는, 나랑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세계에 불과했다.

그렇게 30년을 넘게 살아왔던 내 인생에 아주 작은 변화가 생긴 건 작년 4월 엄마와 다녀온 나고야 여행. 겸사겸사 놀러 간 김에 방문했던 한 조선학교였다. 마침 공개수업 날이라 페이스북을 통해 협조를 구했고 흔쾌히 응해준 총련 관계자와 들어갔다.

일본 소학교 같은 느낌의 그 작은 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복도엔 김정은 위원장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조국을 향한 열정이 돋보이는 빨간 스카프를 한 소년단의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으니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저쪽에서 쪼그마한 아이들이 달려온다. 날 보더니 구십 도로 허리를 바짝 숙여 “안녕하십니까!”

귀여운 배꼽인사를 마주하니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두어 시간 학교를 돌아보고 날 안내해준 총련 친구와 커피나 한잔하러 들어간 카페에서 맥주를 각 네 잔씩 마시고 나왔다. 헤어질 때 그 친구가 건넨 쪽지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가 통일광장에서 만납시다.”라고 써 있었다. 왜 뭉클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때 그날 이후로 조선학교가 뭘까. 총련이란 뭘까 호기심이 생겼다는 것.

일본에는 총련과 민단이라는 단체가 있다. 흔히 전자는 북한, 후자는 남한에 가깝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총련이라고 해서 다 조선에 적을 두는 것도 아니고 민단이라고 해서 다 한국에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걸 안 순간부터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니 그럼 도대체 조선학교의 정체는 뭔가. 김복동 할머니는 왜 조선학교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기부하신 걸까.

“내가 한창 배워야 할 때 공부를 못한 게 한이 됐다. 꽃다운 나이에, 마음껏 배워야 하는 이쁜 나이에 차별 때문에 배울 권리를 빼앗겨선 안 된다”

김복동 할머니 말씀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친구를 앞에 두고 “그런데 넌 국적이 어디니?”라는 말을 감히 꺼낼 수 있었을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이번 출장에서 비록 촬영은 못 했지만 사전취재 겸 방문했던 도쿄 조선 고급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만났었다. 방과 후에 배꼽인사 하면 허허 웃으시던 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다를 바 없던 그분. 어딘지 모를 낯익은 인상인 그분의 한마디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세계 어디를 가도 교포 5세가 우리말을 하고 한반도에 국적을 두는 경우는 없어요.”

이거다. 초상화가 걸려있는 교실, 이질적인 말투와 억양, 낯선 생활방식, 조금은 다른 사고방식. 그런 걸 다 떠나 할아버지 세대부터 일본에서 살아온 아이들이 “고향은 어디에요?” 물어봤을 때 “저는 제주도 서귀포시입니다”라고 또박또박 우리말로 대답하는 저 모습. 그게 이 취재를 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난 그렇지 못했다. 9년이란 시간을 일본에서 살아오면서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드러내려 한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내게 일본은 그런 나라였다. 외국인들, 특히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겐 지독하리만큼 배타적인 나라. 잠깐 일본에서 지냈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써 있던 내 책상. “안녕하시무니다” 비아냥거리던 아이들의 말투.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무슨 시대일까? 라는 역사시험문제. ‘적고 싶지 않다’ 쓴 내 답지에 인자하던 담임선생님이 처음으로 분노하던 모습.

그 기억을 가지고 다시 찾은 일본 땅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류미리 라는 한자가 야나기 미리로 읽히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적도 있었다. 그런 내가 재일동포들을 만나서 “왜 일본 이름을 쓰세요?” “한국인이라는 게 알려지면 주변에서 반응이 어때요?” 물어볼 때마다 과연 내가 이 질문을 던질 자격이 있는 걸까. 매순간 부끄러웠다.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문부과학성에 나가 매주 금요일 시위를 벌일 때, 난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불금을 즐겼다. 이 아이들이 듣도 보도 못한 우리말을 열심히 써가며 외울 때, 어떻게 하면 일본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그런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채 다시 찾은 일본이었다. 무상화 집회 날 섭외하겠다고 찾은 뒤풀이 자리. 수년간 동포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워온 변호인단과 재일동포들 앞에서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취재해나가겠다.” 말했던 건 그간의 무심함과 무지함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유학 시절 내 방엔 항상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밖에 나갈 땐 짙은 눈화장을 하고 높은 힐을 신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구사하려 애를 썼다. 거리에서 이따금씩 혐한 시위를 볼 때면, 도심 한복판에 휘날리는 욱일기를 볼 때면, 울컥해서 눈물이 났다. 그럼에도 일본 친구들에게 “저거 너무 한 거 아니니”라고 단 한 번을 꺼내볼 용기가 내겐 없었다.

너무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담기엔 버거운 주제의 아이템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라도 알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훨씬 강하게 든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한결같이 맑고 밝았다. 취재하러 갔다가 힐링받고 왔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이들은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깔깔거렸다. 자기들보다 덩치가 훨씬 큰 우리를, 포옥 안아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더랬다.

마음이 아프고 짠하고, 부끄러웠던 일주일이었다. 그래서 막상 취재비하인드를 풀어내려고 자리에 앉으니 지하철 타고 다닌 게 뭐 밥 좀 못 먹고 잠 좀 못 잔 게 뭐. 그 상황에선 웃기고 서로가 짠해서 또 웃었지만, 사실 그 이상의 감정을 우린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부정할 순 없다. 같이 간 분들, 정말 고생 많이 했다.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예상치 못한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게 유일한 희망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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