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6일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 뭐라고 써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쓰여있는 글씨가 보였다
김영승 '반성'
좋아하는 시다.
이 시가 주는 느낌은 좋은데
시 제목을 맨날 까먹는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본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
대충 이런 문장이었던 것 같은데
찾는 시는 안 나오고
저마다 술 먹고 다음날
후회와 반성이 가득한 글을 토해내고 있다.
남일 같지 않네.
기억을 더듬어 시인의 이름을 넣으니
'반성'이 나온다.
그렇게 매번 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곱씹는 시다.
시인과 제목을 메모해둘 법도 하지만
저렇게 꾸역꾸역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새벽 다섯 시에 첫차를 타고 들어가 오전 아홉 시부터 운동하러 갔더랬다. 피곤해, 술 하나도 안 깼어, 하면서도 꾸역꾸역 배드민턴장에 기어나갔다. 같이 마신 동생들과 술냄새 풍기며 웃고 조금만 뛰어도 땀범벅되는 서로에게 땀에서 술냄새 난다며 비웃고. 근데 이제 못하겠다.
어제 같이 마신 동생은 나랑 열두 시까지 술을 마셔놓고도 오전 8시에 운동가겠다며 준비 중이란 카톡을 남겼다. 난 그 시간에 꿈나라였다. 오전 열한 시쯤 깼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동생이 하필 어제 꿀주를 마시자고 했고 분위기에 취해 꿀주로 달렸던 게 화근이었다. 소주 한 잔 가득 따르고 맥주를 아주 살짝 얹어 달달한 맛을 만들어내 꿀주란 이름이 붙었나 본데, 맛이 간다. 소주 다섯 병을 열고 마지막 안주였던 먹태를 시켰을 때, 내 기억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운동 잘하고 있냐는 물음에 쉬엄쉬엄 누워있다 게임 잡히면 들어간다는 동생의 카톡을 보며 나의 젊음은 조금씩 가고 있음을 체감했다. 그 친구와 난 무려 11살 차이 난다. 몇 달 전까지 쌩쌩하다 자부했던 나의 체력은 오늘로 마감했다. 다시는 술을 (그런 식으로) 먹지 않겠다.
안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사람들이 서성거리는 버스정류장 뒤편으로 사람 한 명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이 나온다. 예전에 친구를 기다리다 이 골목길은 뭐지? 들어갔던 곳이었다. 좁은 길을 걷다 보면 조금 넓어진 작은 골목길이 나온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백여 미터 남짓 되는 골목 가에 막걸릿집 홍어집 전집이 즐비하다. 한 골목만 넘어가면 시끌벅적한 인사동이지만, 그곳은 아직 90년대에 멈춰있는 듯한 곳. 노상에 깔아놓은 테이블이며 비 오는 날이면 빗소리에 취할 처마가 있다. 김벌레 선생님이 극찬할 빗소리를 막걸리 한 잔에 만끽할 수 있다.
유목민 노마드라는 술집의 그 공간은 갈 때마다 오감을 흥분시키는 곳인데, 어제 나의 청각을 혼미하게 만들었던 건 옆자리 테이블 연로한 교수님이었다. 한껏 시끄러웠던 청년들 (단체 소개팅이라도 하는 걸로 보였던)이 떠나가고 고요했던 옆자리에 점잖은 중년 남성 여성분들이 들어왔다. 그중 한 분은 하모니카와 기타를 연주하시는 것 같았는데,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 우리 자리는 라이브 카페가 되어있었다. 유목민 노마드 흰 수염 덥수룩한 사장님과도 안면이 있으신가 보다. "어이고 오랜만에 오셔서 또 이렇게 연주해주시네"
김광석 노래로 시작된 작은 연주회는 밤 열한 시가 넘어가도록 끊일 줄 몰랐고 동생이 타 준 꿀주 한 잔에 호강하는 귀를 붙들고 한동안 머물렀더랬다. 곡은 이어지는데 술도 안주도 끝나가길래 아쉬운 마음에 주문했던 먹태와 소주 한 병이 화근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찜질만 하고 있었다. 오후 네시가 지나도록 두통이 가시질 않아 기어이 편의점에 나가 숙취음료를 사 왔다. 돌아오는 길 노랗게 지는 석양이 보였다. 이렇게도 하루가 가는구나, 후회로 물든 하늘이었지만 그럼에도 술을 다신 먹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게 아닌 '저런 식으로 먹지 말아야지' 할 수 있는 건 가게 이름처럼 떠도는 인연들이 스치듯 만나는 그 시간이 그리워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