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치마

2020년 2월 18일

by 알로

고등학교 졸업 후 유학길에 올랐을 때 트렁크에 넣었던 책은 단 한 권이었다. 상실의 시대. 중고등학생 필수 독서. 지금 생각해도 그 책이 왜 중고등학생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인지 모르겠다. 성숙한 친구들의 입장은 또 다르겠지만.


꾸역꾸역 가져온 상실의 시대는 4년 동안 내 책장에 먼지 쌓인 채 꽂혀있었다. 한 번도 안 꺼내본 건 아니다. 읽어나 볼까, 펼쳐 들고, 곯아떨어지고, 다시 꽂아두고를 반복했을 뿐이다. 그 사이 먼지가 쌓여갔다.


어느 날 주말 아침이었다. 침대에 뒹굴거리는데 또다시 눈에 들어온다. 흠. 읽어볼까? 꺼내 든 자리에서 완독 했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야?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다. 하얀 그림자 위 선명한 핏자국.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퍼런 표지. 좋아하는 이유엔 그 시절에 대한 향수도 한몫하겠지만 무엇보다 흥미를 갖지 않았던 존재에 어느 순간 빨려 들어 감을 경험하게 만들어준 덕이 크다. 책을 읽기 전과 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인상이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그저 절대적인 취향이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커피가 그랬다. 일본엔 도토루라는 커피 체인점이 있다. 우리나라 웬만한 스벅 직영점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커피숍이다. 학부 시절 과제할 때 자주 찾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서 시럽 두 개, 밀크 두 개 넣고 달게 달게 마시는 게 나만의 취향이었다. 당시 280엔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280엔이다. 변하지 않는 물가만큼이나 한결같은 맛. 어느 지역 어느 동네를 가도 도토루는 있다. 단골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시럽 두 개와 밀크 두 개를 고수했던 나의 취향은 세븐일레븐에 갓 볶은 원두커피가 등장하면서 일순간 사라졌다.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그 맛을 알아버린 거다. 그날 이후 단 커피는 입에도 대지 않게 됐다.


어렸을 때 몸에 좋다고 지어준 한약을 화분에 몰래 버렸다. 엄마는 기겁을 하며 등짝을 내리쳤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한약이다. 비 오는 날이면 친구들이랑 맨발 벗고 하교했다. 일곱 살짜리 추억담이 아니다. 대학교 때 그러고 다녔다. 지금은 비 오는 날 약속이라도 잡힐까 무섭다. 내게 취향이란 그런 것이었다. 영원히 고수할 줄 알았지만 불변이란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결말을 가져다주는 것.


엊그제 폭설이 내렸다. 올겨울 들어 처음 보는 설경에 하루 종일 설렜다. 때마침 (전 날 술기운에 리스트로 올려놨던) 검정치마 노래가 흘러나왔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3초를 못 참고 다음 노래로 돌렸을 텐데 어제, 오늘 하루 종일 무한 재생 중이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싫다, 는 말을 안 하게 됐다. 싫어하는 게 별로 없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혐오한다고 생각했던 번데기와 선짓국조차도 '싫다'는 말 대신 '못 먹긴 하는데'로 바뀌었다. (심지어 둘 다 어렸을 땐 좋아하던 음식들)


그나저나 검정치마 한시 오분, 가사 참 좋다. 올 겨울 가기 전에 눈 한 번만 더 내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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