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지 않은 손님

속옷도둑

by 알로

일본에서 자취하던 시절. 나의 집은 1층이었다. 가진 예산 내 선택지가 많지도 않았지만, 집 보러 다닌 지 10분 만에 결정해버린 데엔 작은 마당이 한몫했다. 2층짜리 작은 아파트 (일본에선 작은 멘션을 아파트라고 부른다). 아담하고 길가에 있어서 위험하지도 않아 보였다. 일본에서 집을 구할 땐 암호와도 같은 1R, 1K, 1DK, 1LDK를 알아야 하는데 내 방은 방과 부엌 사이 작은 문으로 두 공간이 구분된 1K였다. 1K의 K는 Kitchen. 부엌이랑 방을 구분하는 문 한 짝이 왜 그리도 좋았는지 모르겠다.

살짝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조차 좋았다. 슬리퍼를 신고 걸어 다닐 때마다 바닥과 바닥의 이음새가 내는 작은 소리는 이 집이 낡았지만 정갈하다는 느낌을 더해줬다. 부엌 옆엔 세탁기가, 그 맞은편엔 작은 세면대와 화장대로 삼기 충분한 거울이 놓여있었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분리돼있었다. 더불어 베란다 문을 열면 작은 텃밭까지 있었으니. 내겐 완벽하기만 했던 공간.


그런 완벽한 공간이 저렴하게 나왔던 건 1층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1층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이 선호하지 않는 층이다. 기본적으로 월세가 저렴하다. 도로보다 한층 올라와있긴 해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높이였고 맘만 먹으면 베란다로 뛰어들 수 있는 허들 낮은 난간이 유일한 안전망이었다. 일본에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딱히 위험한 경험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별 걱정 없이 계약했던 집.


하지만 친한 친구가 놀러 와 밤새 수다를 떨고 잠깐 편의점에 다녀오자며 집을 비운 10분 사이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스크림과 먹거리 몇 개를 사 와 쟁여놨다. 친구는 티브이를 보겠다 했고 나는 씻고 나오겠다 했다. 붙박이 옷장을 열어서 속옷 바구니를 뒤지는데, 어라?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힌다. 바구니를 꺼내보니 텅 비어있다. 빨래를 이틀에 한 번꼴로 하는 터라 속옷 바구니가 비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상하다 싶어 세탁기를 열어보니 텅 비었다. 아하, 빨래를 널어놨었구나 베란다에 나갔는데 기묘하다. 모든 빨래가 그 자리 고스란히 걸려있는데 속옷을 꼽아놨던 곳에 빨랫집게만 덩그러니 걸려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야, 나 속옷 도둑맞은 거 같아."

"뭐라고?"

"속옷만 없어"

"설마. 왜 그래 갑자기 무섭게. 다시 찾아봐"


아무리 찾아도 없다. 도둑맞았을 땐 특유의 느낌이 든다던데, 정말 그랬다. 경찰에 신고했다. 친구랑 있다니 다행이라며 문밖에 나오지 말고 기다리라 했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근데 이상하다.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쎄한 느낌이 들어 친구랑 부둥켜안고 있다가 나가보겠다며 문가에 다가갔다.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아무도 없다. 이상하네? 분명히 소리를 들었는데. 문을 열었다. 역시나 아무도 없다. 그런데 문가에서 바시락 비닐봉지 소리가 난다. 누가 현관문에 검은 봉지를 걸어뒀다. 뭔지 모르겠지만 가지고 들어와 열어봤다. 숨이 턱 막혔다. 내 속옷이었다.


내 속옷. 중에서도 짝이 맞지 않거나 속에 입는 반바지, 양말, 흰 티에 받쳐 입는 얇은 나시티가 들어있었다. 왜 이것들이 돌아왔는지 이유를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속옷 바구니를 몽땅 털어갔는데, 본인에겐 필요가 없는 것들을 다시 돌려준 거였다. 어떻게 아냐고? 아니 그것밖에 답이 없지 않나. 사실 나도 모른다. 그냥 본의 아니게(?) 돌려받은 속옷들을 본 순간 그걸 확신한 것뿐이었다.


경찰에 다시 전화했다. 내 번호가 등록된 건지 받자마자 해명을 해댄다.

"여경이랑 동행해야 되는데, 여경이 출동 중이라 기다리느라고 시간이 걸렸어요. 이제 곧 갑니다."

"아, 괜찮아요. 그런데 속옷의 일부가 돌아왔어요."

"네?"


충격적인 도난사건으로 정신이 이상해졌나 의심하는 눈치다. 몇 번을 말해도 똑같이 되묻기만 한다.

결국 10분이 채 지나기 전에 경찰차가 도착했다. 몇 시경에 어디로 외출했는지, 문은 잠겄었는지 확인하겠다며 몇 가지 사항을 묻거니 CSI에서나 보던 지문 수사를 시작했다. 방바닥에 흰색 가루를 뿌려놓고 뭘 열심히 들여다보는데, 초범이 아닌 것 같다, 발바닥도 지문도 안 나온단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친구를 남겨두고 난 여경과 함께 경찰차에 탔다. 도난당한 물건을 사건으로 보고해야 되는데 물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거다. 그 물건은 내 속옷이니 난 속옷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털어놔야 하는 입장이었고 민감한 사항일 수 있다 보니 여경이 동행한 것이었다.

외국에서 난생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것도 여경 앞에서 "하얀색인데요. 레이스가 달렸고요. 오른쪽에 큐빅이 있는데요" 눈동자를 굴려가며 기억을 더듬어 속옷에 대한 정보를 뱉어낸다는 건, 굳이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내 속옷을 잉크펜으로 백지에 그려낸다는 건 꽤나 묘한 경험이었다.


결국 범인은 잡지 못했지만 집주인에게 보고를 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낡은 건물에도 CCTV가 달렸다. 집주인은 "이런 말 하긴 굉장히 민망한데..." 같은 빌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의심된다 말했다. 한동안 나의 지인들이 총동원돼서 나와 동행했다. 친구가 한 명씩 돌아가며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고, 심각한 트라우마 없이 지나간 편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선 여자가 절대 1층에 안 사는 거야" 아르바이트하던 가게 점장한테는 한소리 들었고

"우리 집도 훔쳐갔었어. CCTV 촬영 중이라고 거짓말로 붙여놨는데, 그다음부턴 안 들더라 도둑이" 써먹을만한 조언도 들었고

"생일선물은 속옷 사줄게" 달갑지 않은 선물도 받았고

이래저래 잊지 못할 경험이긴 했다. 보험을 들어둔 덕분에 속옷의 정가를 고스란히 돌려받았는데 잃어버린 속옷이 많았던 터라 수십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 돌아왔다. 참 별일이 다 있었다. 그래도 이 기억이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소소한 추억담으로 남은 건 그날 차 안에서 무서웠죠? 혼자 살면 그런 일이 많죠. 괜찮아요? 도와줄 테니까 언제든지 연락해요, 손잡아주던 여경의 마음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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