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찾은 답
십 년이면 금수강산도 변한다는데 나의 10년 전과 지금은 뭐가 얼마나 변했나 생각해보니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10년 전의 난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원하는 대학원에 입학해 가슴 당당히 펴고 지냈던 시절. 1학년 때 받지 못한 장학금을 받기 시작했던 3월. 본격적으로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밤 연구실에 남았던 시절. 학부 때와는 다른 수업의 퀄리티에 공부 그리고 연구가 세상 즐거웠던 시절. 교환수업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길 건너 유엔대학으로 넘어가 인도와 하와이, 미국 본토에 있는 학생들과 화상채팅으로 수업하며 세계로 뻗어나갈 상상을 하며 지냈던 시절. 그렇다. 어찌 보면 허세이자 사치 같은 그 생활을 온전히 누렸던 20대 마지막 황금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도 충분히 어렸는데 뭘 그리 세상을 안다 자부하고 지냈었는지 ㅎㅎ
그리고 1년 뒤 3월. 4월 개강이라 봄방학 중이었다. 쳇바퀴 같은 알바 생활이 이어지던 나날. 책 보고 산책하고 사람 만나고 돈 벌고 모든 게 평화로웠던 봄날의 어느 날 일어난 지진.
기필코 일본에서 성공하여 조국에 이바지하겠노라 금의환향을 노렸던 내 일생의 계획은 그날로 무너졌다. 뭐 그리 대단한 꿈을 꾼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 그 무기력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진 당시 겪었던 공포감도 뒤늦게 티비에서 본 쓰나미도. 누가 일본 시민들은 질서 정연하게 재난 속에서도 침착했다 말했던가. 내가 본 건 달랐다. 동네 편의점 생수와 빵, 인스턴트식품은 물론 화장지까지 동이 났다. 지진의 공포란 전염병의 공포와는 또 다르게 엄습해온다. 원전이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방사능에 대한 공포는 뜬소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조차도 정보가 없어 무서웠다. 언제 어디서 뭐가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밤잠 못 자고 전화기를 붙들고 일주일을 버티다 일시 귀국했고 5월에 다시 들어가 작별인사를 고하고 왔다.
잡지사 취직, 견딜 수 없었던 회사생활, 난생처음 백수로 지낸 시간, 등록금을 벌려고 시작했던 일본어 과외 그리고 복학. 방사능이 무서워 선택했던 오사카 생활. 결국 못 견디고 돌아간 도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했던 동네. 골방에 틀어박혀 논문에 미쳐있던 시절. 또다시 귀국. 세월호 그리고 지금의 회사.
나의 9년을 단 몇 줄로 추려내고 나니 참 별 거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미처 적어내지 못한 일들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 더욱 놀라운 건 이중에 나의 계획대로 진행된 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나의 선택이었지만 상황에 끌려다닌 날이 훨씬 많았다. 지진의 전과 후로 달라진 게 있다면 단념이 빨라졌다는 것.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게 된 것. 그리고 20대 초반에 가졌던 것처럼 뚜렷하고 명확한 꿈을 꾸지 않게 됐다는 것. 그날의 기억이 안겨준 무력감 덕분이다. 참 오래도 가져왔다.
얼마 전 선배와 대화를 나누다 이 회사에 들어온 건 세월호가 기점이었다고 고백했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더니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네가 세월호 때문에 이곳에 들어왔다면 그 비극적인 사건은 사람들의 삶과 인연들을 끊임없이 연결시키고 확장시키는 선한 작업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해주고 있는 것이겠지."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뒤엉켜버렸다 생각했던 내 인생에 대한 답도 그의 대답 속에 들어있었다. 9년 동안 풀지 못했던 답. 그리고 알게 됐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란 거. 계획대로 풀리지 않으면 거기엔 더 큰 의미가 담겨있다는 거. 내 할 일은 그 의미를 찾아내며 열심히 살아가는 일뿐이라는 거. 진부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계획을 다시 세우고 만다. 상황에 끌려다니기 시작하면 끝없이 끌려다니게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 후회가 없으려면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없다는 걸. 매순간 가장 행복한 선택이 최선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