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그냥' 확 그냥
1)
일본인 친구가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8년째 살고 있는 나름 한국 베테랑인 직장인 여성이다. 친한 지인이 그를 만나면 너무 아무렇지 않게 아베 총리의 욕을 해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했다.
[일] 그 사람은 나를 만나면 꼭 아베 총리 욕을 하거든. 그냥 슬쩍 지나가듯이 아 진짜 그 새끼는 문제야, 그런 식으로 말해. 나도 아베가 잘못하는 부분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이 욕하면 괜히 기분이 나빠. 팔이 안으로 굽나 봐. 되게 무례하다고 생각해. 내 가족 욕하면 우리 가족이니까 알아서 할게. 냅둬. 그러잖아.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
[한] 아무래도 그렇지. 나도 외국 나가서 누가 우리나라 대통령 욕하면 발끈할 것 같은데?
[일] 근데 또 네가 나한테 아베 욕 하는 건 아무렇지 않거든.
[한] 그것도 신기하네? 그럼 네가 그 사람한테 서운함이 있는 거 아니야?
[일] 너도 일본에 있을 때 그런 적 있어?
[한] 있지. 난 근데 차라리 싫어! 말하면 좀 편할 것 같아. 일본 사람들 중에 아닌 척하면서 비아냥 거리는 말투 있잖아. 살살 긁으면서 진심이 뭔지 모르겠는 간접적인 말투. 예를 들어서 너네 나라 대통령한테는 어차피 그게 최선 아니야? 뭐 그런 식으로 말하면 이게 기분이 나쁜 건데 콕 집어서 욕을 한 건 아니고. 난 그런 느낌이 너무 싫어서 차라리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게 편할 것 같아. 그냥 문화 차이 아닐까?
[일] 그렇지. 다른 거겠지. 난 애국심이 있는 편이 아니거든. 그냥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아무 신경 안 쓰고 욕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돼.
[한] 응. 좀 개념이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정치 얘기는 지양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던 거 아니야? 아니면 일본 사람이라는 인식보다 그냥 네가 너무 편해서 그런 인지를 안 하고 있다던가.
[일] 모르겠어. 말할 틈도 없이 자기 혼자 욕하고 혼자 다른 얘기로 넘어가.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또 그런 이야기가 나오걸랑 무슨 또 정치 얘기를 하고 그래요, 다른 얘기해요, 하고 넘겨들으라 말했다. 어렵다. 난색을 표하면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이 돼버린다. 친구가 조금이라도 정색하면 '너도 역시 일본 사람'이란 꼬리표가 붙을 테니 친구 입장에선 지인 의견에 반기를 드는 게 쉽지 않을 거다. 반대로 지인 역시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녔겠지. 그럼에도 친구는 상처를 받고 있었다.
2)
나는 굉장히 큰 소리로 웃는다. 음, 이건 어렸을 때부터 버릇이다. 그 누구도 내게 웃는 걸 가지고 뭐라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유독 기억에 남는 '웃음소리'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취객이 큰 소리로 잠꼬대하는 걸 듣고 있었다. 전철 안은 조용했고 오로지 그 남성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상황. 취해서 혀가 꼬일 대로 꼬였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힘주어 발음했기에 알아들을 순 있었다. "그 고기 내 거야. 내 거야. 먹지 마. 내 거야."의 무한반복. 무슨 술자리였는진 모르겠으나 고기를 양껏 먹지 못했구나, 혼자 웃고 있는데 늘 다정다감하던 친구가 옆자리에 앉아있다 정색했다. "일본에선 이런 상황에서 웃는 거 아니야."
예전에 잠깐 일주일 정도 단기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일본 화장품 브랜드에서 런칭과 함께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초청해 백화점에서 메이크업을 시연하는 행사. 일주일 동안 전국 각지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아티스트와 동행했었다. 세련되고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브랜드였기에 통역하는 내내 정장 차림이어야 했다. 메이크업은 통역 찬스로 아티스트로부터 매일 아침 받을 수 있었다. 말투도 행동도 조심스러워야 했는데, 어쩌다 아티스트가 던진 개그가 웃겨 박장대소했던 순간. 날 고용했던 실장님의 한마디. "00 씨, 좀 경박하게 웃는다."
너 그런 개그에 웃어주지 마, 진짜 웃긴 줄 알잖아, 라는 말을 굉장히 자주 듣는 편인데 난 억울하다. 웃음이라는 게 억지로 나오진 않는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안 웃긴데 웃을 수 있는 재능이란 내겐 없는 것이다. 다만 포인트가 좀 다르긴 하다. 그 티 어느 티? 00 씨가 입으니까 프리티? 같은 아재 개그를 누군가 던지는 상황. 난 그 개그가 웃긴 게 아니라 개그를 던진 사람이 어디서 주워들은 걸 애써 따라 하는 모습이 웃겨서 웃는다. 적어놓고 보니 굉장히 구질구질한데, 워딩에 웃는 것과 상황에 웃는 건 다른 문제다. 어쨌든 오해를 자주 사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가 마음 놓고 웃고 싶을 때 웃는 건 역시 애인이나 친구들, 가족 앞에서다. 몇 년을 알고 지내온 사람 들인 만큼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사랑해줄 것 같은 안전지대. 실로 우리는 서로가 웃는 걸 보며 따라 웃는다. 웃음이란 전염되는 거니까. 여느 때와 다름없이 통화하던 날, 별 거 아닌 일에 웃겨서 웃었는데 잠깐 정적이 흘렀고 돌아온 대답. "넌 그런데 왜 그렇게 웃어?"
3)
아직까지 저 일들을 못 잊고 있는 걸 보면 나도 꽤나 소인배인가 보다. 지금 내 입을 통해 나가는 이 말들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필터링 몇 살을 더 먹어야 생기는 것인지. 상대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그냥 흘려보낼 줄도 아는 여유로움은 언제쯤 장착될런지. 좀 더 너그러운 사람이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