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만 안 했더라면

너도 그랬잖아

by 알로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출근하는 길, 현관문에서 배웅해주던 엄마에게 "아니, 근데... 나 머리 자른 거 진짜 모르는 거야?" 화들짝 놀란 엄마는 "어디?" 되묻는다. 어디? 라니. 눈 앞에 있는 내 머리.


예상했던 답변이 튀어나온다. "너도 엄마가 머리 했을 때..." 못 알아봤잖아, 가 나오기 전에 엄마의 말을 잘랐다. 그런 대화를 나눌 심산은 아니었다.


엄마, 그냥 물어보는 거야. 머리 어때? 괜찮아? 민망함에서 미안함으로 바뀐 것인지 굉장한 하이톤으로 칭찬 퍼레이드가 이어진다. "훨씬 예쁘네. 가벼워 보여. 너무 잘했다. 이뻐. 근데 언제 잘랐어?" 응? 그저께.


출근길 내내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나에게 늘 져주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저런 반응을 보니 엄마도 사람이구나, 싶다. 사람은 왜 궁지에 몰리면 방어적인 태도부터 나오는 걸까. 가장 빨리, 편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핑계다. "너도 그랬잖아"


내가 자주 써먹던 화법이기도 하다. 나는 그냥 넘어갔는데, 너는 왜 걸고넘어져? 너도 그런 적 있으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해?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 몰랐어, 미안해, 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친한 언니와 사이가 틀어졌던 적이 있다. 6개월 정도. 매일 얼굴을 보고 살다보니 6개월은 6년처럼 더디게 지나갔다. 어렸을 땐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지는 걸 감당하지 못했다. 여렸던 탓이다. 타인에게 미운 감정을 가진 채 잠드는 것도 타인이 나를 안 좋게 바라본다는 사실도 견딜 수 없어했다. 남자 친구에게 서운함이 있으면 그날 바로 풀어야 했다. 친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그런 나의 성격을 편하게 여겼고 누군가에겐 나의 직설적인 태도가 부담스러웠을 거다.


언니는 이사를 했다며 집들이 날짜를 잡았다. 또 다른 언니와 셋이 가진 술자리에서였다. "두 달 뒤야. 다들 기억해." 듣자마자 휴대폰 캘린더에 저장했다. 문제는 그 뒤였다. 다음날 나는 휴가를 떠났고, 신나게 물놀이를 하던 중 핸드폰은 먹통이 돼버렸다. 한국에 돌아와 새로 장만한 휴대폰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흔한 백업도 안 해놨던 상태라 전화번호부와 사진, 모든 게 날아갔다. 사라진 것 중엔 캘린더도 있었지만 수백 기가바이트에 달하는 영상과 사진이 날아갔으니 내게 캘린더는 안중에 없었다. 그 와중에 집들이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5월의 토요일이었다. 약속된 날짜를 이틀 앞둔 날, 모처럼 우리 셋이 모였다. 언니가 물어왔다. "내일모레 뭐 먹어야 좋을까?" 새카맣게 약속을 잊고 있던 나는 되물었다. "어디 좋은 데 가세요?" 내 말을 들은 언니는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쳐다본다. 눈빛이 점점 바뀌어간다.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짜고짜 역정을 냈다. "나는 너한테 화가 나." 면전에 대고 화가 난다, 는 말을 해온 사람을 나는 처음 봤다. 보통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나. 살짝 당황했다. 약속을 잊은 건 미안했고 입이 열개라도 한 말이 없었지만, 언니의 분노에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발끈하며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언니에게 두어 차례 연락을 했고 두어 차례 사과를 건넸다. 언니는 '다시는 집들이 부를 일이 없을 것'이라며 대화를 끊었다. 그렇게 지옥같던 6개월이 시작됐다.


얼굴을 보고도 인사를 안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만 쏙 빼놓고 두 언니가 밥을 먹으러 갈 땐 절망감마저 들었다. 한결같이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는 언니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이상했다. 남들도 이상하다 했다. "그 일이 그렇게 싸울 일이야?" 사정을 들은 이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언니. 동시에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언니. 그럼에도 그 불편한 상황을 자처했던 건 뒤늦게 올라온 나의 분노가 컸다. "언니도 그랬잖아"라는 심보였다.


"다음 주 화요일에 영화 상영회 가실래요?"

"나 갈래!"


약속했던 영화 상영회 당일, 언니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넌지시 물어보니 '대체휴무'란다. 약속을 잊은 것이었다. 카톡창에 '언니! 오늘 약속 까먹었어요?'까지 적어놓고 보내질 못했다. 내 마음이 너그러워서가 아니었다. 굳이 언니와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았고, 약속 까먹을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한마디로 큰 기대를 않았다. 조금이라도 서운했더라면 언니에게 말했겠지만, 그러지 않고 넘어갔다는 건 내 성격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소소한 헤프닝이었단 거다. 그런데 웬 걸, 잊고 있었던 일이 언니의 분노를 보자마자 되살아나는 거다.


그래서 6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봄에서 여름이 지나 가을이 성큼 다가온 어느 날. 때마침 가을비가 내렸다. 어제까지 카톡을 주고받던 사이마냥 "비도 오는데 막걸리나 한 잔 하실래요?" 연락했다. 언니도 아무렇지 않은 듯 "좋지" 답장을 보내왔다. 막걸리 한 잔은 한 병이 되고 자리는 2차로 이어졌다. 그날 난 언니에게 거듭 사과를 했다. 근데요, 혹시 기억나세요? 지난날의 이야기도 끄집어냈다. 언니도 잊었잖아, 저는 넘어갔는데. 그래서 서운하더라고요. 이야기를 듣던 언니, 정말 몰랐던 눈치다.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급기야 미안하다며 울기 시작한다. 나는 또 당황했다. 화를 내고 눈물을 쏟을 정도로 내가 대단한 존재였던가. 휴지를 건네는데 이상하게 속이 갑갑하다. 이럴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닌데. 나는 왜 그냥 사과를 하고 끝났을 일에 언니의 과오를 끄집어냈던 걸까. 언니한테도 사과를 받았어야 속이 시원했나. 그냥 나만 잘못하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을, 나만 사과하자니 배가 아팠던 건가. 내가 묵혀온 감정이 한 사람의 눈물을 쏟아내게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던가.


생각할수록 난 그날 진심으로 사과를 한 게 아니었다. 언니에게 가졌던 서운함은 진짜가 아니었다. 나도 잘못했지만, 언니도 잘못했었다는 걸 방패 삼은 것뿐이다. 그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탓을 하는 건 익숙한 일이니까. 그것은 연인들 사이에서도 흔하게 등장한다. 화해를 멀리, 싸움은 가까이 만드는 심보 "너도 그랬잖아"


너 왜 전화 안 받아? 너도 어제 안 받았잖아.

너 왜 말을 그렇게 해? 너도 나한테 그랬잖아.


나만 잘못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한쪽이 "내가 언제?" 라는 말을 뱉기라도 하면 그날 잠은 다 잔 거다. 어느 한쪽이 지칠 때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싸움은 이어진다. 그때부턴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싸움이 아닌 이기기 위한 싸움이 돼버린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내 머릿속 오랫동안 자리 잡아온 "너도 그랬잖아" 라는 사고 회로를 잘라버리기로 했다.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는 습관은 갖고 있지 않기로. 나에겐 좀 더 엄한 잣대를, 남에겐 관대한 잣대를 갖다 대 본다. 그럴 수 있지, 라는 시선. 정작 편해지는 건 나다. 머리 자른 거 왜 몰라? 가 아니라 머리 잘랐는데, 어때? 면 된다. 사실, 그게 더 예쁘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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