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하루

그리고 오늘밤

by 알로

엄마와 평소처럼 지내고 있지만 사실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못했다. 최근 나에겐 거사였던 그 이야기를 못했다는 건 겉도는 대화만 했단 뜻이다. 엄마는 여전히 내 방송을 매일 모니터해준다. 방송이 끝나고 카톡창을 열어보면 "오늘도 잘 봤다, 수고했어~~^^" 라는 카톡이 남겨져있다. 쓰고보니 자동완성기능이라도 있나 싶다. 어쨌거나 엄마와는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도 무궁무진한 대화의 소재가 있다. 아이템 이야기, 회사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하다못해 진도에서 택배로 보내온 자연산 미역 이야기로 식사 시간은 거뜬히 채워진다.


이야기를 하지 못한 데 딱히 이유는 없다. 다만 한 가지. 그와 엄마가 상당히 비슷한 성향의 소유자였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둘 다 외골수였다. 난 말수가 적은 편인데 이상하게 엄마와 남자 친구 앞에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수다쟁이가 되는 사람이 세상에 둘뿐인데, 유일하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그 둘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대답이 없길래 쳐다보면 핸드폰을 보고 있는 것도 똑같았다. "내 얘기 듣고 있어?" 확인해야 했다. 어쩜 닮아도 그런 부분이 닮았을까 싶으면서 그런 점이 딱히 싫지는 않았던 나날이었다. 신나서 수다를 떠는데 뜬금없이 "근데 반찬 맛있지?" 물어보는 엄마나 "근데 나이키 새로 나온 거 예쁘지?" 물어보는 남자 친구나. 둘의 공통점은 날 서운하게 한 적도 많았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기대고 살았단 뜻이겠다.


그래서 헤어졌다는 말을 아직 못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뻔했다. 아직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안 돼있다고 해야하나.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늘 겉도는 이야기만 하고 산다. 예전보다 대화가 짧아진 건 확실하게 느낀다.


며칠 전 퇴근하고 돌아와 침대에 앉아있는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문간에 기대 이것저것 질문을 던진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 하루 어땠는지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대답도 짦았다. 엄마는 할 말을 더 찾는 눈치였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피곤할 텐데, 잘 자. 돌아선다.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쌩뚱맞은 생각이 든다. 엄마가 혹시 나랑 이야기하고 싶었나. 엄마가 오늘 하루 대화를 나눈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아빠는 없고 코로나만 있는 요즘 엄마의 하루는 어땠을런지.


엄마는 책 보는 거 좋아해. 혼자 있는 거 좋아해. 조용한 게 좋아. 우리 집이 얼마나 좋은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엄마의 말들을 곱씹어본다. 진짜 좋기만 할까? 어쩌면 그 긴 하루 중 한 번쯤은 외롭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이제야 보인다. 엄마에게 가장 반가운 소리는 퇴근하고 돌아온 내가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겠구나, 이제 들린다.


오늘 낮에 할머니가 구급차에 실려가셨다. 진도에 있는 아빠도 회사에 있던 나도 서울 어딘가에 있었을 고모들도. 피 섞인 자식들이 자기 살기 바쁘다고 머뭇거리는 사이 엄마는 말없이 할머니댁으로 가장 먼저 향했다. 엄마 혼자 감당해야 했을 시간들. 녹초가 돼서 집에 돌아온 엄마는 날 보자마자 끼니부터 묻는다. "저녁은 먹었고?"


우리 가족은 매년 새해 목표를 적어 부엌에 걸어둔다. 31일에 떼고, 1일에 붙이는 연례행사. 작년까지 붓글씨와 그림, 독서, 운동... 열개가 넘어가는 목표를 세우던 아빠는 올해부터 욕심을 버리겠다며 '마음의 평화'라 적어냈다. '배드민턴 C조승급, 이직'과 같은 온전히 나를 위한 목표를 적어내던 난 올해도 여전히 나를 위한 목표를 적었다. 엄마의 목표는 하나였다. '두 어머니'. 엄마의 엄마와 아빠의 엄마한테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엄마는 목표대로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어떤 딸인가. 오늘은 잠이 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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