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시간
지난해 방영됐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정주행 중이다. 세상 모든 건 등가교환의 법칙으로 흘러간다는 교훈을 주는 드라마. 비단 물질적인 것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원하는 것과 그에 따른 희생, 젊음의 대가, 시간의 가치까지.
아직 7화까지밖에 보지 않았지만, 잔잔하게 감동과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매회가 끝날 때마다 엄마와 아빠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 남주혁은 참 표정연기 좋다는 생각, 한지민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허스키한 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축 쳐지고 하루 종일 기력도 없고 갑자기 막 짜증도 나고."
극 중 한지민 엄마 역인 이정은의 대사. 갱년기 증상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보는 내내 곱씹었다. 우리 엄마의 갱년기는 언제였더라. 자식에게 사춘기가 있다면 엄마에겐 갱년기가 있다는데 우리 엄마의 갱년기는 내 사춘기만큼이나 조용히(?) 지나갔다. 엄마는 원래 짜증 없는 성격에 감정 변화가 도드라지지 않고 쭉 평행선을 달리는 성향. 조용하고 차분하고 정적인 사람. 엄마의 이름 '화정'도 평화로울 '화'자에 고요할 '정'자다. 너는 엄마를 참 잘 안다, 내 편은 너구나, 행복한 듯 웃으며 말해오지만 정작 나는 엄마에게 찾아왔을 오십견도 고요하게 지나갔을 갱년기도 무심한 편이었나보다.
엊그제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엄마와 간단한 대화를 나눈 뒤 씻고 한참 동안 방에 있었다. 침대에 뭘 올려놓다 떨어뜨려 쿵 소리가 났는데, 거실에서 엄마가 말한다. "00이 집에 왔구나."
엄마, 뭐야. 장난치지 마. 아까 나랑 인사했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을 올라오기 전에 삼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억을 못 하는 건가? 나랑 분명히 아까 대화를 나눴는데? 정말 기억에 안 나는 거면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방을 나가보니 우리 엄마, 졸고 있다. 잠꼬대였다. "아이고, 깜빡 졸았네." 멋쩍은 듯 웃는다. 웃어주어 고맙다고 생각했다. 잠깐이었지만 너무 놀랐으니까.
'눈이 부시게' 엄마 역할 이정은은 늙는 게 두렵다는 딸 한지민에게 말한다. 무서워할 거 하나도 없어, 그냥 애기 때로 돌아가는 거야.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밥도 못 먹는 애기 때로. 한지민은 중얼거린다. "애기는 귀엽기라도 하지."
저거 뭐야? 이건 무슨 맛이야? 여기는 어디야? 왜? 왜? 왜? 왜? 왜?
끝없이 질문을 던졌던 내게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모르는 건 찾아보는 거야, 라는 대답도 있었지만) 알려주던 엄마와 아빠.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저번에 말해줬잖아'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엄마와 아빠. 오늘 아침 보험료 산정기준을 물어보는 엄마의 질문에 내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저번에 말했는데..."였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를 키워낸 엄마 아빠에게. 혼자서 점점 할 수 없는 게 늘어날 엄마 아빠에게. 나는 어떤 딸이 되어야 하는가. 춘삼월 깊은 밤의 끝자락에 이런저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