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남자가 보낸 문자

by 알로


시청역 5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면 서울시청의 푸른 잔디광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왼쪽으로 돌아 저 멀리 파란 지붕을 눈에 담는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자리에서 청와대가 또렷이 보인다는 건 그날의 날씨가 매우 맑다는 뜻이다. 백 미터 정도 걸어 나아간다. 오른편에 알록달록한 언론사 건물이 우뚝 서있다. 빌딩의 다채로운 색깔과 창문에 비친 파란 하늘이 기분을 한층 띄워준다.


청계천을 건너 일민미술관에 다다른다. 오른편 대각선 저 멀리 낡은 갈색 건물이 보인다. 일본 대사관이 있는 리마(利馬) 빌딩이다. 열아홉 살 때 비자받으러 혼자 찾아왔던 곳이다. 길 잃어버리면 안 돼, 잘 갈 수 있지? 엄마의 노파심과는 달리 꽤나 유유자적하게 이 일대를 누볐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다. 광화문을 즐겨 찾게 된 건.


신호를 기다리며 교보문고 외벽에 내걸린 글판을 읽어 내려간다. 다시 걸어가 KT 건물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5분 간격으로 지나가는 1020번은 내가 좋아하는 곳을 훑어간다.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라 불리는 미술관 <석파정>과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자하문터널, 그리고 윤동주 문학관. 문학관 뒤엔 작은 언덕이 있다. 시인이 하숙 생활을 하던 시절, 수시로 올랐던 곳으로 알려졌다. 동산에 올라 바라보는 서울은 아득하게도 멀지만, 아름답다. 나 역시 이 곳에서 20대를 보냈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언덕에 올랐다. 다시 찾을 때마다 지난번에 끌어안았던 고민을 떠올린다. 한 때 전부였던 고민들은 결국 대수롭지 않게 흘러감을 느낀다. 나 역시 그 언덕에서 조금씩 성장해왔다.

수없이 오른 언덕이지만, 맑은 날씨는 운이 따라줘야 하는 법이다. 최근 몇 년은 미세먼지로 뿌예진 하늘만 바라보다 내려왔다. 이날은 달랐다. 북악산 능선 따라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도 이토록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하늘은 새파랬다. 성곽에서 내려다보이는 부암동의 오랜 가옥들. 골목길 사이사이 오가는 사람들 발걸음에 시선이 가 닿았다.


한참을 머물다 문학관 쪽으로 돌아 내려왔다. 문학관 입구엔 시 한 편이 적혀있다. 윤동주 시인의 <새로운 길>이다. 갈 때마다 읽는 게 버릇이라 이날도 계단에 올라 한 문장씩 곱씹고 있었다. 그때였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저 멀리서 나를 주시하다가 뒤따라 올라온다. 문학관을 찾는 사람은 아닌 듯하고,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눈치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연락이 끊겨서요... 핸드폰이 꺼졌는데, 혹시 핸드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알아듣기엔 너무 작은 목소리다. 다시 물어보려던 찰나 그의 시선은 내 손에 들린 휴대폰에 머물러 있는 걸 본다. 빌려달라는 이야기 같기는 한데, 낯선 사람에게 휴대폰을 내어준다는 건 아주 오랜만에 있는 일이다. 재빨리 행색을 훑어보지만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아... 핸드폰이요?"

신종 사기인가. 요즘은 개인정보를 이런 식으로 빼내나.

남성은 전화 한 통만 신세 지겠다고 했다. 딱히 거절할 변명거리도 없으니 휴대폰을 내줬다. 남성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거리를 좁혀 여차하면 (내 휴대폰을 가지고 도망가면) 목덜미를 낚아챌 생각이었다. 나름 배드민턴으로 단련된 몸이니까 자신 있었다. 그는 내 눈치를 힐끔 보더니 열심히 통화하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 사이 남성은 괜한 혼잣말을 늘어놓는다. 아, 통화 중이네, 이상하네. 괜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아 더 수상쩍었다. 같은 번호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거는 모양이다. 의심이 점점 커지던 찰나 남성은 문자 한 통 보내도 괜찮겠냐 물어왔다. 그리하라 했다. 내 건 아이폰이니 타이핑하기 불편하겠다, 싶어 대신 문자를 작성해주겠다 하는데 극구 사양한다. 도톰한 검지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더니 왼손에 내 휴대폰을 쥐고 자음 하나, 모음 하나를 천천히 누르기 시작했다. 한참이 걸리길래 고개를 들어 슬쩍 들여다봤다. 남성이 가장 먼저 적었을 두 글자가 보였다.


'여보'


아... 연락이 끊겼다는 건 아내였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의심의 눈초리로 훑었던 그의 행색이 한순간에 포근하고 가정적인 중년 남성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강도라도 덮칠 기세로 콩닥거렸던 나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로지 저 두 글자로 모든 긴장이 무장해제됐다. 사람 마음은 이렇게도 간사하다.


한참을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게 다시 건네 온다. 감사하단다. 그리곤 방긋 웃는다.


"문학관 보러 오신 거죠? 이 위에 시인의 언덕도 있어요. 거기 올라가면 참 좋아요. 꼭 가보세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남성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교보 외서 코너는 자주 가지 않는 사람이면 쉽사리 찾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해있다. 부부는 종종 외서 코너를 동행했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존댓말을 쓰는 사이였을 거다. 길을 잃어도 어떻게든 연락을 줄 거란 믿음, 만날 거라는 믿음이 있는 관계였을 거다. 마침 바람이 세게 불던 날인 탓인가 만나는 장소를 실내로 정한 건 남편의 배려였으리라. 그리고 휴대폰을 빌려준 고마운 낯선 이에게 본인이 아는 좋은 곳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선의.


단언컨대 숱한 나날,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얻은 그 어떤 위로보다 마음에 묵직하게 와 닿은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사람의 면모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남성이 내게 보여준 모습이 그러하듯, 내가 그 남성에게 내세웠던 마음도 그러하다. 나는 이분과 다시 마주할 일이 없는 관계이기에 그날의 순간은 그곳에서 끝이 났지만 어쩌면 그건 내게 또 다른 시작이었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한, 오래 살아도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다짐하는 시작.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진도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