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무슨 글을 쓸까, 고민할 겸 동네 산책을 나왔다. 며칠간 지나간 시간을 곱씹어도 딱히 쓸 거리가 없다. 어제의 술자리는 딱 맞는 옷을 입고 나간 탓에 자리에 앉아있는 내내 살을 빼야겠다고 다짐했다. 배가 어찌나 불편하던지 서너 시간 앉아있었는데 틈만 나면 머릿속엔 '아침 러닝을 몇 시에 할까' '이 바지가 언제부터 이렇게 작았던가' 생각만 맴돌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서 책만 봤다. 빨래도 하고 끼니 세 끼를 해결하고 이불 먼지도 털고 여유롭게 찜질도 했는데 두 권을 읽었으니 나름 꽤 집중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써볼까 싶지만, 별도로 기록해두는 공간이 있기도 하고 아직 소화를 덜 시켰는지 필사해둔 글귀만 몇 생각난다.
이런저런 고민이 오가는 사이 자주 가던 편의점을 지나 영화관 앞에 다다랐다. 편의점에서 1600원짜리 캔맥주를 사들고 벤치에 앉았다. 세상에 움직이는 거라곤 한적한 대로변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빨간색 광역버스뿐. 고요함 속에 울려 퍼지는 버스 엔진 소리에 머리가 멍해졌다. 글감이 없다는 건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하루를 보냈다는 뜻인가 자위하며 검정치마 노래를 틀었다. 올해 들어 빠져 있는 조휴일의 목소리가 딱 잘 어울리는 밤공기다.
이어폰으로 무장된 귓속에 이방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훑으니 저 멀리서 검정치마차림으로 등장한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덩치 큰 남자가 동행하고 있었다. 남녀의 발걸음이 멈춘 건 정확히 내 맞은편 벤치. 어림잡아 스무 개는 넘는 벤치 중에 왜 하필 저기 앉았을까, 궁금해 쳐다보니 그들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딱 달라붙은 둘의 사이는 왠지 모르게 예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얄밉다. 캔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키곤 들리란 듯이 소리 냈다. "캬~"
당연한 거지만 그 둘은 미동이 없다. 자기들끼리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중인가 싶다. 때마침 검정치마가 부른 최애 곡이 나와 휴대폰 화면 속 노래 가사를 곱씹고 있었다. 한참 있다 고개를 들었는데 이번엔 둘이 뽀뽀를 하고 있다.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킨 대가는 커플의 애정행각 관람. 아, 아름다운 밤이네.
누군가와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본 게 언제였던가. 남녀는 한동안 서로 사랑스럽게 쳐다보다 자리를 떴다. 검정치마의 그녀가 추운 듯 어깨를 움츠리자 덩치 좋은 그가 겉옷을 덮어준다. 그렇게 한참을 잔망스럽게 (미안하다..) 꽁냥 거리다 사라져 갔다.
우린 아직 흑백영화처럼 사랑하고
언제라도 쉽고 빠르게 표현하고
맘에 없는 말은 절대 고민하지 않고
뭔가 아쉬울 땐, 밤 지새우고
저런 연애를 해본 게 언제였나, 싶다.
ps. 2월 뒤늦은 함박눈이 서울을 뒤덮은 날 버스에서 우연히 들었던 곡. 언제 들어도 좋은 노래다. 검정치마 <한시 오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