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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y 23. 2020

누군가 내게 말해줬더라면

누군가 나에게 부모님의 젊은 시절은 한순간이란 걸 알려줬다면 나는 좀 더 집구석에 붙어있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아니, 하루가 다르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머지않아 보게 될 거라 말해줬다면 좀 더 자주 사진을 찍었을까. 네가 그토록 싫어했던 불같은 아버지의 성격도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분노도 기력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걸. 누군가 귀띔해줬더라면 조금은 아버지를 덜 미워했을까. 같이 있는 매 순간이, 일분일초가 아쉬운 날이 올 거라는 걸 알았다면 나의 20대는 달랐을까.


집을 비웠던 너의 20대. 타향살이했던 그 10년 동안 그들이 보내온 메일을 너는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을까. '잘 지내지? 엄마 아빠도 잘 지내.' 두 문장에 얼마나 많은 그리움을 삼켰는지 알았다면. 네가 회사에서 하루를 보내고 터덜터덜 돌아와 현관문을 찰칵 여는 그 순간. 엄마의 얼굴이 얼마나 밝아지는지 알았다면. '네가 행복하면 되는 거야.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라는 말을 건네기까지 그들이 고군분투해야 했던 매일의 노고를 네가 알았더라면. 너는 차라리 돈 많이 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 머리 밀고 고시원이라도 들어갔을까.


'엄마는 혼자 집에 있는 게 행복해.'

'오늘 회사에서? 아무 일도 없었어.'

'일? 잘 되지. 힘들 게 뭐 있어 걱정 마.'

'엄마? 엄마 알잖아. 괜찮아.'

'아빠는 네가 행복하면 행복해. 잘 컸다 우리 딸.'


네가 가장 잘나고 행복해 보이는 사진을 SNS에 올리듯 네 앞에서만큼은 가장 괜찮고 멀쩡한 모습만 보여주려 했던 그들의 마음을 너는 알까. 어쩌면 남들처럼 살가운 사위나 며느리가 보고 싶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 이름 한 번 불러보고 싶고, 매달 두둑이 용돈도 받으며 뭘 이런 걸 챙기냐 손사래 한 번 치고 싶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몰라서 못한 건 아니었다. 


그랬으니 20대로 돌아간다 한들 여전히 친구들과 갖는 시간이 중요했을 거고, 청춘은 영원할 것처럼 굴었을 거다.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건 어버이날이 유일했을 거고, 이따금씩 합격통지나 취직처럼 좋은 소식을 안겨드리면 그걸로 효도하고 있는 거라 착각했을 거다. 


요즘 우리 집에선 수제 팩이 유행이다. 도대체 어디서 얻어온 정보인지 모를 민간요법이다. 베이킹소다와 레몬인가 들깻가루인가를 비율 좋게  잘 섞어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뽀얘진다는 알(면서도) 쓸(데없어보이는) 신(기한) 잡(지식). 그 썰을 맹신하는 건 엄마다. 그런데 생각보다 꽤나 효과가 있는 편이다. 아침 밥상에 두 분이 하얘진 얼굴로 등장할 때마다 놀란다. 엄마는 놀라는 데 그치지 않고 나에게 격한 리액션을 요한다.


"아빠 얼굴 좀 봐봐. 하얘졌지? 검버섯 많이 사라졌지?"

모든 오감을 동원해 세상에서 가장 밝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어머나! 엄마가 말한 대로 효과가 있네. 이야 정말 끝내주네."

"그렇지 그렇지?"


사실은 불편하다. 검버섯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 단단해 보이기만 했던 아버지의 장딴지가 어쩐지 빈약해 보였던 날. 옛날이었다면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희미하게 웃으며 '널 믿는다'라고 말해왔던 밤. 불 끄고 자라며 방문 앞에서 뒤돌아선 어깨가 왠지 모르게 측은해 보였던 순간. 매일 꼬박 챙겨 먹는 약이 한 알, 두 알 늘어가는 걸 알았을 때. 나이 듦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그날부터였다. 나이를 각인시키는 모든 단어를 듣고 싶지도 내뱉도 싶지도 않았다. 


직장에 들어오고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면서부터 나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공부에 미치고 노는 것에 미쳤던 때는 하루가 길었다. 그때는 몰랐다. 반년만에 혹은 일 년 만에 부모님과 마주하며 흰머리가 늘었네, 체감했던 것과는 다르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고 있다는 걸 시시각각 느낀다. 


정말 오랜만에 술에 취해 들어온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의 귀가가 늦으면 엄마는 안방에서 선잠을 자고 올빼미 체질인 나는 택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도록 창문을 열어놓는다. 너무 고요해서 뒷산에 이름 모를 새소리만 정적을 채우는 늦은 시각, 아버지는 도착한다. 대문을 열고 나가 술냄새에 절어있는 아버지를 마중한다. 살면서 한 번도 달갑지 않았던 취한 아버지를 보며 잠옷바람에 마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가늠해본다. 씻지도 않고 내 침대에 앉은 아버지에게 손 세정제를 건넨다. 아버지는 시키는 대로 열심히 손을 비비며 웃는다. 그리곤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빠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는 요즘 아기로 돌아가는 중이다. 지난해 겨울 즈음부터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아주 가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신다. 세상이 치매라 부르는 그 증상이다. 올초부터 엄마와 아버지는 할머니를 자주 찾아왔다.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걸 아무도 입밖에 꺼내지 않지만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빠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

"알지. 나도 세상에서 엄마랑 아빠가 제일 좋아."

"다행이다."

"왜?"

"네 나이에 엄마 아빠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어."

"자식이 있을 나이라 그런 게 아닐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또 다 그렇지만은 않더라고."

"그렇구나."

"요즘 할머니를 보면... 내가 엄마를 얼마나 좋아했었나 생각해."

"응."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걸 할머니가 알만큼 온전히 시간을 쏟아본 적이 없더라. 바쁘다는 핑계로."

"바빴으니까."

"다 핑계야, 핑계, 핑계..."


아마도 내가 느끼는 시간의 속도보다 아버지가 느끼는 세월의 속도는 더 빠른 듯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

이 말이 뭐라고 그렇게 아끼고 살아왔을까.

살면서 몇 번이나 할 수 있다고.

곱씹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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