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해본 짓

by 알로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렀다. 이번 주말 약속을 잡지 않았다. 읽을 책도 많고 다음 주에 있을 강연 준비도 해야 했다. 일요일 낮에 잠깐 피부과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합정에 들러 겸사겸사 교보문고나 돌아보다 올 심산이었다. 같이 운동하자는 연락이 몇 번 왔고 매우 힘들게 유혹을 걸러냈다. 아침에 일어나니 살짝 감기 기운이 있었다. 어제 산책하다 쏟아져내린 비를 맞은 까닭이겠지만 흘러나오는 콧물을 핑계 삼아 피부과 예약을 취소했다. 점심을 차려먹고 커피를 내리는 동안 잠이 쏟아졌다. 잠깐 누워볼까, 하고 기댔던 소파에서 내리 다섯 시간을 잤다. 자면서 꾼 꿈은 거의 대장정 수준이었다. 꿈에서도 나는 일하고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그러니까 주말 이틀을 꿈쩍도 안 하고 집에서 보낸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건 마치 채식주의자가 눈 꾹 감고 핏기가 감도는 미디엄 웰던 소고기를 한 입 먹는 것과도 같다. 햇빛과 자외선에 노출되는 걸 혐오하는 사람이 선크림도 모자도 없이 땡볕에 나가 누워있는 것과도 같다. 코로나로 집순이의 매력을 알았지만 그래도 주말 중 하루는 조용히 어디라도 돌아보고 와야 직성이 풀렸던 나의 삶에 또 한 번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눈만 끔뻑끔벅거리고 누워있었다. 창문 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아침인가 착각할 정도로 오랜 잠을 잤다는 걸 깨달았다. 하늘을 보니 정확하게도 늦은 오후의 볕이었다. 옅은 푸른색을 띤 하늘. 경계선이 희미해진 구름들. 모든 게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날씨가 매우 좋았던 날임을 알 수 있었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강연 멘트도 준비하고, 월요일에 촬영 나갈 아이템도 고민했어야 했고,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는데. 이도 저도 아니라면 책이라도 몇 권 읽었어야 하는 이 귀한 시간을 고작 잠이나 자면서 보내다니. 그것도 일하는 꿈을 꾸다니.


자는 동안 빨간 숫자들로 채워졌던 카톡창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답을 한다. 점심때 내려놓은 커피를 마시려고 포트에 물을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 책 한 권을 가져왔다. 그리곤 깨닫는다. 진짜 주말다운 주말을 보낸 거구나. 너무 잘했다, 나. 캘린더를 확인해보니 딱히 서두를 이유도 없다. 강연 준비야 내일부터 집중해서 하면 되는 거고 아이템 고민은 지금부터 서서히 하면 되는 거고. 책도 읽으면 되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온전히 나를 위해 보낸 주말이었던 거다.


올해부터 30년 넘게 해오던 일을 잠시 접고, 집에 머무는 엄마를 떠올린다. 나처럼 활동적이진 않아도 누구보다 일을 사랑했던 엄마다. 별다른 욕심도 없고 그저 책 보는 게 즐겁고 연구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학자다. 내가 보낸 주말이 엄마에겐 매일일 것이다. 이 고요한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을 거다. 이따금씩 물까치가 찾아와 까악 까악 지저귀면 그 모습 한 번 담아보려고 휴대폰을 들고 창가를 서성거렸을 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잠에서 깨야겠다, 싶을 땐 포트에 물을 끓여 커피를 내려 마셨을 거다. 옆집에 사람 목소리가 들려오면 저 집은 오늘 손님이 왔나 보네, 중얼거리기도 할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용해지면 그 정적으로 나 홀로 이 집에 있음을 오롯이 절감하기도 할 거다. 아직 바깥에 나가 있는 식구들이 언제쯤 돌아오려나, 생각도 하겠지. 그런 매일을 보내고 있을 엄마가 유독 어제오늘 많이 떠올랐다.


굳이 채찍질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쉬는 것에 좀 더 관대해져야겠다. 고요함에 조금 적응해봐야겠다. 뭔가 더 바빠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뭐 하나라도 더 보고, 일정이 빡빡한 주말만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무의식 중에 나를 채찍질해온 잣대들이 많았다. 그런 시간이 있었으니 지금의 쉼도 달가운 거겠지.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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