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고도 어려운
70살 어르신이 재난지원금을 받고 적은 댓글이 연일 화제였다. 오랜만에 국거리로 소고기를 사 드셨단다. 아내의 낡은 안경도 맞추고 평소 먹고 싶었던 시루떡도 주문하셨단다.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에 뭉클하셨단다. 은퇴한지 오래돼서 세금 한 푼 안 내고 있는데 젊은이들에게 감사하다는, 우리의 미래는 밝다는 내용이었다.
재난지원금을 기부해라, 뭐라고 했냐 줬다 뺐는 거냐, 잘못 눌러서 전액 기부됐다, 시스템이 엉망이다, 맥북에어를 산단다, 그거사라고 주는 돈 아니다, 하나로마트는 되는데 이마트는 안 되냐, 세대주한테만 가는 게 어딨냐, 니들은 뭘 그렇게 말이 많냐. 사람들은 재난지원금을 받아들고 끝없는 사투를 벌였다. 각박했다. 그 어떤 반응도 나올법한 마땅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저 댓글 앞에서만큼은 숙연했던 걸로 기억한다. 대다수는 뭉클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대통령도 한 마디 얹었다. 저도 뭉클했습니다.
말 그대로 한 숟가락 더 얹었을 뿐인데 댓글엔 악플이 달렸다. 오늘 본 기사의 베스트 댓글은 '내가 낸 세금 돌려받는 건데 니가 사비 냈냐? 왜 니가 뭉클하냐?" 였다. 바로 그 아래 댓글은 조금 달랐다. '코로나로 수입이 줄었는데 재난지원금 덕분에 장을 볼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세 번째 댓글은 보다 객관적이었다. '나라 살림 잘해서 국민들이 낸 세금 유용하게 쓰이는 것 같은데 이래도 난리 저래도 난리네'.
다 같은 심정일 거다. 아니, 다른 심정이면 어떤가. 이런 사정도 있고 저런 사정도 있다. 우린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니까. 하지만 말은 다르다. 같은 말을 해도 밉게 하는 사람들은 늘 있다.
오랜만에 배드민턴을 치러 갔다. 시설관리공단에서 공식적으로 체육관을 개장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내심 궁금한 눈치다. 한 명 두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마스크 속 얼굴들엔 설렘이 가득했다.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기간 동안 그 약속을 잘 지킨 사람들이라면 4개월 만의 운동이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꼬박 땀 한 바가지를 흘려낸 사람들이 4개월 동안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정답은 확찐자다. 우리는 너도 나도 확찐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럼에도 주고받는 인사는 정겹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니? 아이고, 실력이 그대로네. 어디 아픈 데는 없고?
하하호호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주고받는데 저 멀리서 오랜만에 등장하는 클럽 회원 A가 걸어왔다. 그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건네니 고개를 끄덕끄덕. 그는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면서도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힐끔거렸다. 웃는다. 할 말이 있나 싶어 따라가니 "나 OO씨 못 알아봤어." 한다. 무슨 뜻인가 되물었다. "못 알아봤다고. 누군지 몰랐다고."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살쪄서요?" 물으니 박장대소하며 사라진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딱히 좋지도 않고 이상했다.
살이 찌긴 쪘는데 그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네, 양 볼을 꼬집으며 체육관을 걸어다니는데 저 멀리서 또 다른 회원 B가 다가온다. 내 얼굴을 또 빤히 쳐다보더니 웃는다. "어쩌면 그러니?"
이번엔 또 뭘까.
"뭐가요?"
"어쩌면 운동을 그렇게 쉬었는데도 더 예뻐졌니? 너도 그렇고 저기 OO이도 그렇고. 애들이 왜이렇게 예뻐졌어 어쩜 그래."
그렇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사람을 보고도 저렇게 다른 말이 나온다. 결국 말이라는 건 상대방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달라지나보다. 그러나 드러나는 건 상대방이 아닌 자신이다. 상대방을 서술하고 있지만 결국엔 나라는 사람이 드러나는 게 말이다.
사실 A가 내게 말한 건 친근감의 표시일 수도 있다. 내가 예민했던 걸 수도 있다. B는 정말 나를 예쁘다고 생각했을까? 모른다. 살이 찐 걸 두고 돌려말한 걸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살이 찌고 안 찌고 예쁘고 안 예쁘고의 문제는 애초부터 아니었다. 하나를 말해도 예쁘게 말하는 사람한테는 두배 세배를 더 얹어 돌려주고 싶다. 그날 밤 운동하고 돌아와 B를 떠올렸을 때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B는 평소 차(茶)를 좋아해 집에서 끓여온 차를 마시곤 했다. 다음에 보게 되면 집에 있는 차라도 가져갈까, 즐거운 고민을 했던 밤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말 한마디에 움직인다. 이렇게도 단순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