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얼마 전 이천 화재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유가족들을 취재하고 왔다.
"고민이 됐어요. 어떤 인터뷰를 담아야 할까. 굉장히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저로서는 고민이 되는 거예요. 자극적인 인터뷰를 담으면 소위 말하는 '잘 팔리는' 기사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기사는 계속 남잖아요. 시간이 지나고 가족분들이 기사를 봤을 때를 생각하니까..."
우리는 커피숍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주위 시끌벅적한 소리들에 묻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목소리를 키워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입술을 읽어야 될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한 마디도 빠뜨리기 아까워 귀를 기울였다. 그때 깨달았다. 힘을 가진 목소리란 결코 큰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점점 커지는 건 어쩌면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걸 수도 있겠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보다 덜 집중하는 것 같다던가 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는 마음. 그녀의 아슬아슬한 입모양까지 읽어내려고 의자를 당겨 앞으로 몸을 쭈욱 내밀었다. 술 취했을 때 더 크게 웃고 더 격하게 반응하는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목소리가 커야 힘이 있다는 편견. 어쩌면 나도 그 편견에 젖어 목소리를 키워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엔 가식이 섞였을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말에 무게가 실린다는 건 그래서 무섭고 정확하다. 그녀가 털어놓는 이야기에 내가 귀를 기울였던 건 평소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없는 소리는 입에 담지 않는 우직함이 그녀에겐 있었다. 늘 행동이 먼저였고, 한참 후에야 말을 건네는 신중함이 있었다. 당장 그 순간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욕심 따위 평소 그녀에겐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같이 앉아있던 동료에게 "이것 좀 봐. 이렇게 훌륭한 생각을 갖고 있다니까, 이분이." 격하게 동조하자 그녀는 조용히 부정했다. "누구나 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거예요, 기자라면." 그녀는 끝까지 자신을 내세우려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지난해 배드민턴 클럽에서 촬영한 게임 영상을 짤막하게 편집해 SNS에 올렸던 시기가 있었다. 클럽용 인스타그램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짧게는 10초 길게는 1분 가까이되는 영상들에 배드민턴 동호인들은 좋아요를 눌러왔다. 재밌더라, 클럽 분위기 좋아 보이더라. 술자리에 가면 늘 화두가 됐다. 편집자인 나도 흥이 났고, 영상에 출연하는 동생들은 더욱 신나 했다. 몇 달쯤 지났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게임을 촬영하고 있는데, 예전과 달라진 걸 느끼기 시작했다. 안 넘어져도 되는데, 격하게 넘어진다던지. 웃음을 유도하려고 일부러 큰 소리를 낸다던지. 할리우드 액션 저리 가라 싶을 정도로 과도한 리액션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와 영상을 확대해보고 나서야 동생들이 힐끔힐끔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의도적인 우스꽝스러움은 진솔한 재미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마치고 최근 일주일을 돌아봤다. 내가 뱉는 글과 말, 행동에 대해 얼마큼의 무게를 느끼고 있는가. 잘 쓰는 글,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닌 얼마나 내 마음을 진솔하게 담아냈는가.
"이따가 볼게"
"꼭 할게"
"내가 해줄게"
"말만 해"
수많은 말들이 오로지 그 순간을 위해 희생된다. 허공에 버려진 말들은 행동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보란 듯이,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외치고 살아왔다. 새삼 부끄러워졌다. 참 감사한 건 그녀가 내 앞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이다.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마음의 스승과 매일 마주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잘났다는 말 한마디 스스로 하지 않아도 언제나 그녀는 빛난다. 좋은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 감사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