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지는 것과 격해지는 것

by 알로

언젠가부터 무딤 현상이 생겼다. 감정이 무뎌진다. 상대방의 행동이 내 기대에 어긋나도 (가령 약속을 갑자기 깬다던지, 반응이 떨떠름하다던지) 실망하는 시간이 짧아졌달까. 예전 같았으면 크게 분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친한 사이라도 적당히 거리가 있을 때 행복이 유지된다고 믿게 됐다. 실로 그렇게 행동하다 보니 마음이 편한 건 나였다. 술자리에서 흥이 나기 시작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도 여전히 지치지 않고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면 (여기서 끝이란 아침 해를 보며 말짱하게 귀가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빨리 집에 가서 씻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차나 홀짝거리다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는 게 이런 거일 수도 있겠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선배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걸 음식에 빗대어 말한 적이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요즘은 제 몸이 너무 소중한 거예요. 내가 뭘 먹느냐에 따라 즉각 반응이 나타나요. 그러다 보니까 좋은 음식을 찾게 되고 그렇게 아주 미세하지만 달라지는 몸의 변화를 관찰하게 됐어요. 그게 재밌어졌어요."


맞은편에 앉아있던 선배의 선배도 맞장구친다.


"그래서 내가 제주에 살잖니. 몸이 편하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보양식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제철 음식을 먹고,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지내고 초록빛 초록색의 음식들이 식탁에 오르니까 삶이 기쁜 거야 그냥."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겸손해진다는 뜻이다. 내 몸의 한계를 알고, 내 몸을 제대로 아낄 줄 알게 된다는 것. 그렇게 나를 알아가는 길은 아름답다.


배드민턴 클럽에 신입회원이 일곱 명 정도 들어왔다. 코로나로 4개월 동안 문을 닫았다가 5월 말에 재개장했는데 일주일 만에 다시 문을 닫았다. 그 일주일 사이에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 사람이 일곱 명이다. 모처럼 찾아와 줬는데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며 안타까워하시던 회장님이 자리를 마련했다. 간단히 밥이나 먹으며 안면을 트자는 취지였다.


야근하고 얼굴이나 비추러 갈 셈이라 느릿느릿 걸어갔다. 삼겹살을 다 구워 먹고 볶음밥을 입에 가져갈 즈음에 도착했다. 잠깐 있을 요량으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웬 걸 한 놈이 엄청 술을 좋아하는 기색이다. 목청도 크고 술도 잘 마시고 여간해서 쉽게 끝날 자리가 아니다.


맞장구치며 술을 받아먹기엔 하루가 너무 피곤했던 터라 맥주 한 잔 따라놓고 신입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는데 아까 그 목청 큰 놈이 사교성은 또 어찌나 좋은지 쉴 새 없이 말을 붙여온다.


밉지 않다. 고맙다. 신입회원들은 보통 낯을 많이 가려서 오히려 내가 말을 많이 붙이고 술자리 분위기도 띄워야 한다. 그 친구는 알아서 질문하고 알아서 술을 따라 마시는, 쉽게 말해 손이 덜 가는 친구였다.


문제는 내 달팽이관이 마비가 될 정도로 크나큰 목소리로 건네 오는 그의 (다소 마음에 안 드는) 화법이었다. 가령,


"회사생활이 재밌다고요? 나는 학생이 좋은데? 그거 진심 맞아요?"

"저 술 마시는 거 좋은데 여자 친구한테 싸대기 맞을걸요? 저랑 술 마시면 안 돼요."

"파주? 왜 파주에서 굳이? 여기까지? 왜?"

"상암동이 살기 좋아요? 거기가? 홍대가 훨씬 좋죠. 홍대 잘 모르시네."

"아, 근데 몇 살이세요? 나이가 좀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일까?"


나이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초면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말을 놓고 싶지도 않았지만 한 마디라도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주에서 홍대까지 배드민턴 치러 다니는 이유도 삼켰다. 그냥 알아서 생각했으면 했다. 술은 더더욱 같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미리 거부해주니 감사했다.


그냥 어서 이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기다리며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는데 잠깐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화장실쪽을 향해 도끼눈을 한다.


아우, 시끄러- 언니, 언니보다 어리지 않아요? 웃긴 사람이네. 왜 반말해?


나 대신 분노해줘서 고맙고 귀엽다. 동생의 말을 거들면서 그치? 싸가지 없지? 별로네.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동안인가 보지 뭐. 나야 좋지. 받아치니 동생은 고개를 또 절레절레. 헤어지는 길, 목청 큰 사나이는 버스타러 가는 내 등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아, 뭐야. 가요? 한 잔 더 안 해요?


귀엽다. 한 잔 더 하고싶은 체력과 열정이 귀엽다.

서른살이 귀엽게 느껴지다니. 맙소사.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점점 자기 검열은 심해지고 타인에겐 관심이 사라진다. 그 낯선 변화가 불편하지만은 않다. 술자리에서 한 번 보고 사람을 어떻게 아나, 싶기도 하다. 운동 안 하지? 살이 좀 올랐네. 한소리 들으면 입 삐쭉거리면서 아니거든요! 했을 텐데 그런가 봐요, 하고 만다. 작고 사소했던 감정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다.


분노를 안 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인도에서 담배를 태우거나 꽁초에 불이 붙은 채로 바닥에 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지어진지 50년이 다 되어가는 아파트에 상수도 연결이 안 돼서 석회물질이 허옇게 드러나는 지하수로 먹고사는 사람들을 취재하면. 사회에 화가 난다.


"짠 거 먹으면 물 한 입 더 먹게 돼서 싱겁게 먹어요. 국은 사치죠. 물이 아까우니까."


물의 기본권이 아직 미치지 못한 취약계층을 볼 때면 세상이 불공평한 것 같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니 일상 속에 존재했던 작고 작은 감정들은 취재를 돌파구 삼아 분출되는 격이다. 이게 잘 가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저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체감하는 건데 그게 생각보다 싫지 않다. 그럼에도 이 일이 성향에 잘 맞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일한 지 6년째 되는 날이다. 7년째 되는 날즈음엔 취재원에게도 취약한 현실에도 분노하지 않고 싶다. 모든 것에 감정을 내려놓고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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