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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l 07. 2020

미운 사람한테는 녹차나 줘버려요

윤회매. 광주 양림동에 간다 하니 엄마가 신신당부하며 꼭 다녀오라 했던 찻집. 홈페이지엔 11시부터라 나와있는데 문이 닫혀있어 구글링으로 번호를 찾아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윤회매 사장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어디실까요?"

"윤회매 혹시 오늘 영업 쉬나요? 가려고 왔는데..."

"어? 이상하다. 지금 아내가 있을 텐데요. 영업하는 시간인데.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3분 뒤

"아이고, 원래 이렇진 않은데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30분 뒤에 영업하고 있을 겁니다. 30분 뒤에 와주시겠어요?"


40분 뒤에 찾아간 윤회매는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말소리가 들린다. 대화를 살짝 엿들어보니 여사장님, 아들이랑 이야기 중이신 듯.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여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다짜고짜 대화가 시작된다.


"낙엽 이쁘죠. 이렇게 크고 이렇게 작은 게 있어서 내가 우리 아들내미한테 아들! 이것 좀 봐, 했더니 아들이 우와~ 해요. 그래서 리액션 더 잘하라고 혼내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엔 크고 작은 낙엽 두 장이 들려있다. 날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묻는다.


"낙엽 크죠?"


배운 대로 대답했다.


"우와~ 진짜 크네요! 아니 낙엽이 벌써 떨어져요? 지금 여름인데? 색깔도 곱다~"


여사장님 흐뭇하게 웃는다. 리액션 습득력 인정.


리액션 시험에 통과한 나는 무사히 윤회매 문화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윤회매가 뭔지 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밀랍으로 만든 매화다.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다음() 김창덕 작가. 조선시대 실학사상가 이덕무의 유산을 구현한 것인데, 적당한 온도로 녹입 랍을 적절한 두께로 떠내고 매화 꽃잎을 만든단다. 노루의 털을 사용해 꽃술을 구현한다. 처음에 눈에 넣었을  어머 뭐야 예쁘다! 하고 점점 가까이 다가간다. 숨이 멎는다. 계속 바라보게 된다. 정교하고 아름답다.


손님은 나밖에 없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계셨는지 마룻바닥이 시원하다. 여사장님 되게 우리 이모 같다. 넉살 좋은 인상이다. "우리 아들이 엄마 손님 오셨는데 그래도 화장하셔야지." 했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바깥은 덥죠? 그래도 안에는 시원하죠? 잠깐만 내가 음악 좀 틀어줄게. 근데 서울에서 오셨다고? 여기는 어쩐 일로? 앉아봐요. 아무 데나 앉아. 아니 좀 더 넓은 데 앉아. 그래 그렇지."


자리 잡고 앉으니 언제 화장한 건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 여사장님. 어머나, 화장하셨네요. 하니 웃는다. 아유, 했지 그러엄. 손님 오셨는데 해야지. 한쪽 눈을 찡긋. 또 웃는다. 이쯤 되니 우리 전생에서 만난 적 있나 싶을 정도로 친근하다.


어디선가 읽었다. 당신이 들어간 가게에서 진정 맛있는 요리를 추천받고 싶다면 직원에게 물어라.

What's your favorite?* 그래서 물었다.

사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차는 뭐예요?


진지하게 고민한다. 눈동자가 반쯤 허공을 향해있다. 그 상태로 말을 이어간다. 아유, 나는 황차를 좋아허는디 황차가 맛있거든. 근데 손님 혼자 왔잖아. 황차는 2인분부터니까 가만있어보자. 대추차. 아, 우리 대추차도 맛있는데. 나는 대추를 공들여 내리거든요? 근디 대추차는 겨울에 먹어야 헝게 오미자차 먹어봐요. 시원해서 맛있어.


그렇다면 오미자차를 시켜야겠다.


가래떡과 조청도 달라했다. 큭큭 웃더니 서울서 왔으니까 가래떡은 서비스~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여사장님. 왠지 흥겹다. 그 사이 여기저기를 훑어본다. 어차피 손님이 아무도 없으니 어디든 내 차지다. 웅장한 스피커가 있는 곳에 시선이 멈췄다. 촘촘이 세워진 LP판은 선반 역할을 한다. 그 위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살포시 얹어놨다. 가만있어보자, 하고 음반 찾다가 내려놓고 간듯한 흔적.



내 멋대로 상상을 끼워 가며 구경하다 윤회매를 눈에 담는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윤회매에 대해서 찾아보지 않았다. 그저 엄마가 가라니 온 거였다. 그런데 막상 눈에 넣으니 이건 오랫동안 담아두고 싶은 한 폭의 그림인 거다. 너무나 진짜 같아서 만져보고 싶을 정도인 정교함. 예쁘게 물든 꽃잎. 무엇보다도 흰색 자기에 매달린 듯 둥둥 떠있는 그 어우러짐이 좋다. 한참 구경하고 자리에 돌아오니 기다렸다는 듯 오미자차를 내온다. 구수한 내음을 풍기는 가래떡도. 해바라기씨와 대추가 앙증맞게 띄워진 찐덕찐덕한 조청도.


오미자차와 가래떡을 가져다준 여사장님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뭘 또 투닥투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 내게로 온다. 차를 우려내는 긴 유리병 주전자를 들고. 그리곤 내 앞에 아주 자연스럽게 앉는다.


근디 광주는 어쩐 일로 오셨어?

아, 예. 제가 전남도청도 한 번도 제대로 안 와보고 해서. 이것저것 돌아볼 겸 왔어요.

아, 518?

네네.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LP판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미스터 선샤인 OST길래 드라마 보셨냐 한 마디 물었다가 한 30분 이야기했다. 남편이랑 같이 봤었는데, 전시회 준비하느라고 요즘은 안 보죠. 아들이랑 같이 보고 싶은데, 시험공부한다고 자꾸 드라마를 끄라는 거야. 지가 언제부터 공부를 했다고. 웃기지 않아요? (실제로 난 이 대목에서 크게 웃었다.)


첫째는 전역한 지 얼마 안 됐고 둘째는 이제 고3이라는 것. 가끔 친정에서 어머니가 팥을 보내주신다는 것. 본의 아니게 팥빙수 맛집이 되어버렸다는 것. 첫째가 언제부터 연극을 좋아했는지,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었는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사랑이 그득그득하게 묻어 나오는 여사장님 목소리 속에서 나는 내 엄마의 사랑을 확인한다. 오후에 계획했던 망월동 묘역은 다음에 가야겠다 생각한다.


잠깐, 아주 잠깐의 마가 생겼을 때 여사장님이 조용히 유리 주전자를 들었다. 그 넓은 공간을 졸졸졸 차 따르는 소리가 채워버린다. 향을 맡으려 코를 내밀었다.


"우엉차예요. 미운 사람한테는 녹차나 줘 불지요. 오래 보고 싶은 사람한테는 이렇게 오랫동안 우려야하는 차를 내주는 거라구요. 우엉차 맛 좀 보실래요?"


차 한 잔 마시러 갔다가 시간을 통째로 선물 받았다. 6월의 광주에서.



*모든 요일의 여행/김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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