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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l 09. 2020

비닐봉지를 든 여성들

자주 가는 지하철역 앞엔 언제나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들이 서성거린다. 양손 가득 무언가 들고 있다. 오피스텔 분양 홍보 안내문과 각티슈, 타월과 같은 자잘한 생필품을 담은 봉지다. 한 손에 하나씩 비닐봉지 든 여성들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스윽 내밀어 보인다. 잠깐 보고 가요. 잠깐이면 돼.


지난여름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열댓 명 되어 보이는 노년의 여성들이 등장했다. 하필 푹푹 찌는 더운 날이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온기가 훅 올라오는 7월. 아스팔트 열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더위.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에도 짜증이 한가득이었던 날.


나 역시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리며 횡단보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든 채 멀찌감치 서서 날 바라보는 여성들. 그중 한 명이 유독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나를 불렀다. 아유 아가씨.


너무 더워서 말도 안 나온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작은 체구에 꽤나 강단 있어 뵈는 여성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몇 번 거절하는데도 내 팔을 잡고 놔주질 않는다.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아니, 너무 아파요. 잡지 말고 말씀하세요.


여성은 화들짝 손을 뗀다.


아이고 미안해요. 나, 너무 힘들어. 너무 더워요. 한 번만 도와주라. 응? 몇 푼 벌자고 나도 하루 종일 나와있는 건데 오늘 한 명도 못했어. 그냥 시원한 데 들어가서 잠깐 앉아있다가만 나와요.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한다.


보고 가세요, 했으면 거절할 거리가 있다. 바쁘다던가 관심이 없다던가. 한 번만 도와달라는 문장엔 거절할 마땅한 거리가 없다. 사기 분양이려나 호기심도 생겨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인천 쪽에 아파트 단지가 생기는데 꽤 괜찮으니 투자한답시고 계약해서 월세를 줘라. 매달 들어오는 돈 꼬박꼬박 받아라.


나와는 무관한 얘기였지만, 홍보관 들어올 때 여성이 신신당부했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너무 빨리 나오면 나 돈 못 받아요. 5분만. 5분만 앉아있다가 가요. 너무 바로 일어나지 말고."


이왕 온 거 허탕 치면 안 되니 그럴듯하게 연기도 했다. 계약금은 얼마를 걸면 되냐, 상업시설은 어떤 게 들어오냐, 원룸 모델 하우스를 한 번 보자. 넥타이를 매고 하얀 셔츠를 입은 남성이 내 앞에 앉는다. 투명한 비닐 파일에 안내문을 한 장, 명함을 한 장 꽂아주며 말한다. 제가 책임지고 잘해드릴 테니까 연락 한 번 주세요.


생각보다 오래 있었다. 15분. 그럴싸한 연기를 마치고 나왔다. 나를 인도해준 여성이 보인다. 할머니, 나 15분이나 있다가 나왔어요, 잘했죠? 너스레나 떨려고 다가가니 이미 난 안중에 없다. 다른 행인을 붙잡고 있다. 비닐 파일을 가방에 밀어 넣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다 건널 때쯤 그녀가 붙잡고 있던 행인은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다시 역 주변을 서성거리는 그녀.


그 후로 비가 오거나 눈이 오지 않는 한 여성들은 매일 등장했다. 가끔은 시원한 홍보관 안에서 그저 손님만 기다리는 넥타이 부대가 원망스러웠다. 보행자 신호를 기다릴 때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여성에게 "이미 다녀왔다"는 말을 건네보기도 했다. '갔다 왔어? 잘했어' 칭찬도 들었다. 내 옆에 선 행인을 붙잡았는데 그가 하도 매몰차게 뿌리치는 바람에 휘청거리는  여성도 있었다. 어떤 날엔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장애인이 주섬주섬 각티슈를 나눠주기도 했다. 한 번씩 홍보관이 있는 자리를 있는 힘껏 째려보기도 했다.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안쓰럽다. 짜증도 올라온다. 왜 시간을 구걸하는 역할을 이들이 도맡아야 하는 걸까. 왜 저들은 매몰차게 팔을 뿌리치는 행인들을 끊임없이 붙잡아야 할까. 돈을 벌기 위해서다.


호객행위는 법의 경계선에 서있다. 도를 넘는 호객행위는 불법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신체접촉은 말할 것도 없다. 반대로 남성이 여성에게 신체접촉을 해오며 호객한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여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하는 건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모든 걸 그러려니 넘어가게 만드는 게 있다. 고령의 여성,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시원한 홍보관 안에서 믹스커피를 저어 마시며 몇 사람이나 데려오나 지켜보는 넥타이 부대는 그녀들이 할머니인 점을 잘 이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취재해보고 싶었다. 음식점 호객행위는 수차례 취재해왔다. 섣불리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 취재가 끝나고 할머니들에게 남는 게 뭘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일자리를 잃으면? 어느 한 명에게라도 불이익이 가면? 말 그대로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 돼버린다.


임계장 이야기 표지



조정진 작가의 임계장 이야기를 읽고 있다. 임 씨 계장이라 임계장이 아니다. 임시 계약직 노인장에서 따온 이름이다. 실제로 일터에서 그렇게 불린단다. 38년간 공기업 정규직 인생을 살다 퇴직하고 시급 노동자로 살고 있다. 버스 회사 계장, 아파트 경비원, 빌딩 주차관리요원으로 일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활자로 오롯이 담아냈다.


며칠 전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서도 경비원의 열악한 근로환경을 다뤘다. 경비원을 섭외하는 건 백 번 생각해도 쉽지 않다. 그들이 스스로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혹여라도 촬영하는 걸 입주민 중 누군가 보고 당사자에게 불이익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쉽다는 노동의 영역은 어쩌면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임계장이 내 아버지라고 생각하니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내가 부디 그 풍경에 익숙해지지 않기를. 차라리 매일 분노하고 고민하는 쪽을 택하고 싶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왔다. 또다시 거리 위에 두꺼운 패딩 차림의 여성들이 서성거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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