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먹으면 사물 (혹은 움직이지 않는 것) 에 말을 거는 버릇이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고주망태가 돼서 전봇대에 "야, 뭘 꼴아봐, 이 자식이!" 하는 그런 주사는 아니지만. 주로 덕담을 건네거나 고해성사를 하는 식이다. 담벼락에 대고 "취객들이 많아서 네가 고생이 많지." 한다거나. 어제는 마당에 세워둔 20년 된 차를 두드리며 "오래오래 고장 나지 말고 장수하세요" 했던 것 같다.
시초는 작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이었던 하루가 있는 집 앞 나무였다. 하루는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렸고 병원에도 데려가기 전에 내가 보는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하루를 보낸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회식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오늘 하루 뭘 했고 누굴 만났고 어떻게 보내다 이제야 집에 들어왔는지 구구절절 읊어댔다. 그것은 하루가 마당에 앉아 매일 하염없이 날 기다리며 궁금해했을 나의 하루이자, 하루가 있던 6년이란 시간 동안 한 번도 해주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고해성사는 늘 미안하다, 는 말로 끝났다.
비가 와 눅눅하게 젖어있는 날엔 꿉꿉해진 수풀을 걷어내며 바람이 통하게 해 주었다. 바람이 차지면서 바닥이 마르면 주변에 낙엽을 끌어모아 덮어줬다. 푸릇푸릇한 새싹이 여기저기로 고개를 쑥 내밀 때면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건져 옆으로 옮겨 놨다. 짧게는 1분 길게는 10분을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무 아래를 찾을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어쩌면 평생 반려견을 다시 못 키울 수도 있겠다. 엄두를 못 낼 수도 있겠다.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드는 그 몇 분을 낙으로 종일 마당에 앉아있어야 했던 네 외로움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안다면 더 키울 엄두를 못 낼 것이다. 그런 하루를 보내라고 지어준 이름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나도 그 세상에 가는 날, 분명히 만날 테니 그때 재미있게 놀아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때쯤이면 나를 덜 원망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