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놀다가 아우 졸려,
하는 상대가 20대 동생이면 뭐야 왜 벌써 졸려, 했다. 상대가 40대 오빠면 그럴 나이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건넸던 말들.
때론 놀리는 말들.
모두가 웃고 당사자도 웃어넘겼던 말들.
농담은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짓궂어졌다. 제아무리 짓궂게 굴어도 그 오빤 늘 허허 웃으며 넘기니 어디까지나 장난으로 받아들여지겠거니 했다.
어제 저녁, 잘 모르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책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주선한 모임이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니 별 부담 없이 나갔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사람은 38살. 그다음이 나. 나머지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초면인 사이가 으레 그렇듯 덕담들이 오갔다.
어머나, 언니 저랑 동갑인 줄 알았어요.
에이, 저는 저보다 동생일 줄 알았어요.
이런 칭찬,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별 의미 없다. 딱히 어려 보이고 싶은 욕심도 없다. 마음이 참 간사하다. 내 나이를 정확하게 맞춰도 묘하게 기분은 나쁜데, 어려 보인다고 해도 그 말듣고 좋아하고 싶지 않다.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인가. 제나이보다 많게 보면 기분 상할 거면서.
남녀가 모인 자리는 어쩔 수 없는 걸까. 연애와 이상형 이야기로 흘러간다. 굳이 기억해보자면 난 스무살 때도 초면인 사람들과 연애나 이상형을 이야기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초면인 남성에게 딱히 설레는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다. 타인의 이상형이 궁금한 적도 없다. 그러니 내겐 영양가가 없는 이야기였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이들은 매우 즐겁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도 물어보길래 배우 유해진이 이상형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아, 그렇죠. 유해진 멋있죠. 센스 있죠. 그들도 대충 수긍하는 분위기다.
유해진은 센스도 있지만, 상대방을 배려하고요. 그러면서 자신을 너무 낮추지 않는 게 힘든데, 그 사람은 그걸 해요. 당당하니까. 꾸밈없고 겸손하고 여유가 넘쳐흘러요. 그런 점이 좋아요.
라고 구구절절 덧붙이진 않았다. 웃자고 던진 질문에 혼자 진지해지는 것 같았다.
또다시 연애 현황으로 화제가 흘러간다. 모임을 주선한 남성이 내게 묻는다.
"그런데 연애 왜 안 해요? 아, 못 하는 건가?"
오, 난생 처음 들어본다, 저런 질문. 제가요? 못할 이유가 없죠, 넘겼다. 옆에 있던 여동생들이 덩달아 채근한다. 오빠, 무슨 말 하는 거야, 언니는 당연히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지. 근데 이상하게 시간이 갈수록 기분이 나쁘다. 맥주 한 잔 원샷하고 막차 때문에 가야 한다고 자리를 나왔다. 30대 중반에 연애를 안 하고 있으면 못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내가 20대였어도 같은 질문을 들었을까. 나이가 이유가 아니었을까 괜히 곱씹어본다.
최근에 참 괜찮은 사람을 만났었는데, 그 사람이랑 헤어진 지 반년도 안 됐다. 막상 헤어지고 나니까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가 않는다. 그래서 알았다. 내가 진심을 다해서 만났었다는 걸. 그리고 아직 내 감정을 연애라는 것에 소비하고 싶지 않다. 지금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다. 라고, 사실은 말하고 싶었다. 당신보다 훨씬 괜찮고, 잘생기고, 매력 있는 남자랑 만났었는데 내가 왜 지금 이런 소릴 들어야겠는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말했다면 분위기는 싸해졌겠지. 진심으로 사과했겠지. 그 아이는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니까. 나쁜 의도는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알았다. 나이 들면 졸릴 수도 있죠, 라던가 흰머리가 많아질 나이죠, 이제 불혹을 넘어섰는데 고운 말 쓰셔야죠, 라며 장난을 던졌던 수많은 순간 가운데 어느 한 순간엔 그 오빠도 기분이 언짢았을 수 있겠구나. 그럼에도 늘 웃으며 흘려들었구나. 포용력으로 내 짓궂음을 보듬어줬던 거구나. 지금껏 그래와준 그 오빠에게 한없이 미안했던 밤이었다.
오늘 생각나서 구구절절 어제의 일을 설명하고 사과했다. 뜬금없는 고해성사에 오빠는 웃는다. '어떤 개새끼가 그런 말을 하냐'며 나 대신 화를 내주다가도, 사실은 그런 말이 상처일 때도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상대가 나니까 웃어넘겼던 거라며 고백한다. 그런 그가 새삼 귀하고 고맙다.
장난이든 진심이든 내가 생각했을 땐 무례하다 싶었던 말이지만, 그 남성이 밉진 않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나 많으니까. 다만 언제든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쁘다는 걸 재치 있게 표현하고, 그 자리에서 들은 말은 집까지 가져 오지 않는, 그런 능력이 나에겐 부족했다. 그 말을 끌어안고 새벽녘까지 속상해하는 내 자신이 놀랍고, 한심했다.
나는 그대론데, 숫자만 늘어간다는 말을 실감한다.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나이가 들었다는, 누군가의 넋두리를 그동안 흘려들었다. 나는 앞으로도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겠지. 속상한 얼굴로 방구석에 앉아있는 나에게 잘 자라며 돌아서는 아빠의 뒷모습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내 방 시계 초침을 보며 또 한 번 절감한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맞겠다. 연애 못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농담도 짓궂네. 저 잘 나가는데요? 하고 털면 된다. 꼬아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삼십 대 중반인데, 결혼 안 해요? 해야죠. 제가 알아서 잘할 겁니다. 당당해지면 된다. 가장 나답게 살아가면 사실은 상처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라는 건 한 사람을 휘두를 수 있는 거구나. 잔잔하지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거구나. 제대로 배웠다. 심기일전하고 싶어서 아주 오랜만에 단발로 싹둑 잘랐다. 그 잘려나간 머리만큼이나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이다. 아주 홀가분하다. 홀가분하게 비워진 만큼 여유가 들어와줬으면. 웃어넘길 수 있고, 금방 비워낼 수 있는 작은 여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