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동생이 말했다.
- 언니, 나처럼 아쉬워하지 말고 연애해, 미친듯이 연애만 해.
이미 다 해봤다고 해도 신신당부해온다.
-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도 막상 앞두면 후회해.
난 절대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꽤 고집스러운 성격이다.
생기발랄한 20대 초반 여자애들이 젊음을 발산하는 걸 보면 나도 저때 저랬지, 자위한다. 어딜 가나 예쁨 받았다. 왜 그렇게 예뻐하지. 왜 실수를 해도 귀여워해주고, 장난쳐도 다 받아주고, 뭘 해도 내가 우선이 되는 거지. 그때는 몰랐다. 요즘 20대 초중반인 동생들을 바라보는 내 표정에 답이 있다. 마냥 예쁘다. 보고만 있어도 예쁘고, 귀엽다. 그때 그시절 언니오빠들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이제는 내게도 보인다. 그래서일까. 내가 받은 사랑들 고스란히 넘겨주고 사는 셈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으론 삐죽삐죽 올라오는 못난 생각이 있다. 나도 저땐 참 잘나갔는데. 그렇게 한창 과거를 추억하며 생각이 머문다. 그런 순간이 쌓이고 시간이 흘러 나이만 먹어간다면 꼰대 되는 것도 한순간이겠다.
내가 갖지 못한 에너지나 인기를 누리는 사람들을 볼 때 근본 없는 질투가 올라온다. 그 질투가 결과적으로 그 나이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젊음의 에너지라는 걸 자각하면 한없이 위축된다. 여자의 마흔다섯 살은 거울도 보기 싫은 나이라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인정하긴 싫었지만 지금 나의 나이는 생기발랄했던 20대와 정서적 차분함이 요구되는 40대의 사이. 애매하다. 그 애매함이 사실은 둘 다 가질 수 있는 포용을 뜻하는 것임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평소 명품이나 화장, 성형, 미의 기준들을 타부시하며 관심 없는 척 해왔다. 대놓고 말한 적도 없지만 주변 사람들이 말해준다. 너는 피부과 가서 돈 수백 쓰는 애 아니지? 너는 성형 같은 거 관심도 없고 안 좋아하지? 명품 허세 이런 거 없는 애잖아? 그냥 웃고 넘긴다. 가끔은 받아치고 싶다. "그런 게 어딨어. 예쁘고 멋있으면 장땡이지." 그만큼 외적인 부분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 걸 보니 올해의 화두는 나이인가 보다. 잊고 살다가도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것.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입어오던 옷이 이제는 조금 부담스러워지는 것. 혹시 내가 불필요한 자존심을 세우는 건 아닐까 어린 동생들 앞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것. 머리와 옷, 화장 상태를 가늠하며 혹시 어려 보이려고 용쓰는 것처럼 보일지 걱정이 생기는 것. 20대 땐 거적때기를 걸쳐도 패션인데, 이젠 아무거나 걸칠 수가 없어 품위라는 걸 곱씹게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부터 50대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온 이가 있다. 회식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이제야 제 나이를 찾아간다 말하면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는 얼굴. 그는 회사 상사이자 사회생활하며 만난 사람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온전히 나의 평안을 빌어주는 인생 선배이기도 하다. 며칠 전 그와 만났었다.
(자칭) 생긴 건 순대국밥에 소주인데, (타칭) 와인과 골프 전문기자. 전 세계 미슐랭을 다 휩쓸고 다녔다는 그의 화려한 경력에 묻어간 덕에 우리 후배들의 미각도 호사를 누려왔다. 그래서 그날은 누추한 노포로 모셨다. 주소도 나오지 않은 종각의 한 골목길. 이런 곳도 즐길 줄 아는 분인지 궁금했고, 이런 곳도 즐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각역 광희 칼국수로 오시면 전화 주세요, 했는데 안 온다. 연락해보니 광화문에 있는 광희 칼국수에 가 있다. 한 번 보고, 두 번 묻고, 세 번 확인할 걸. 대선배를 모셔놓고 주소 확인도 제대로 안 한 우리들은 기껏 나온 음식에 젓가락도 못 대고 있었다. 혹여나 화가 난 선배가 집에 가버리는 거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기다린 지 30분. 덥지도 않았던 초여름 저녁에 선배는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도착했다.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키더니 활짝 웃는다.
"네가 이런 취향이구나."
"어느 정도길래. 기대가 되네."
"내가 웬만한 맛집 다 아는데 여긴 처음 와보네."
"솔직히 이런 데는 분위기지."
"근데 맛있네. 괜찮다. 올만 하네."
"이런 데 어떻게 알았나."
마지막에 나오며 백점 만점 몇 점이냐 여쭈니 "30점" 하고 호탕하게 웃는다. 울상을 지어 보이니 "농담이지. 90점이다." 2차도 안내해보라며 등 떠민다.
강약 조절을 잘한다. 긴장하게 만들었다가 한순간에 긴장을 풀어주기도. 후배인 우리를 결코 누르지 않고 지나치게 추켜세우지도 않는다. 당신을 높이지도 과하게 낮추지도 않는다. 이미 우리한텐 높으니까. 그걸 안다. 잘나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이미 잘났으니까. 후배들에게 아쉬운 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알량한 자존심 그런 건 없다. 솔직하고 당당하다. 그래서 멋지다.
선배 얼굴에 작년보다 주름이 하나 더 늘었는지 줄었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다. 그저 웃는 얼굴에 마음이 요동칠 정도로 푸근한 사람이다. 곧 1년 동안 연수를 떠난다. 행복하세요, 하니 니나 잘해라, 한다. 저는 요즘 행복한데요, 하면 최근 들은 소리 중 가장 기분 좋은 말이네, 한다. 매 순간이 진심이다.
아, 멋지게 나이 들어간다는 건 저런 모습이었다.
어느 순간 눈가에 주름이 생긴다면 참 많이도 웃고 지냈구나 지난날을 뿌듯해하겠다. 좀 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어디로 움직이나, 어떤 점이 기쁘고 속상했나 술래잡기 좀 해야겠다. 굳이 멜론 신곡을 찾아듣지 않아도 명곡을 알면 된다. 지금의 나로 살아가는 방법.